[김인철의 미술산책#17] 모딜리아니의 ‘카임 수틴’ 초상화

모딜리아니가 그린 ‘카임 수틴 초상화’ 1917, 91.7 x 59.7 cm,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집시(gipsy)의 다른 이름 보헤미안(bohemian)은 조금은 경멸이 담긴 뜻으로, 19세기 파리에는 보헤미아(Bohemia), 지금의 체코공화국에서 적지 않은 집시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다소 위선적인 자세로 최소한의 사회적 규제만을 받으면서 자신들만의 도덕에 의한 자유로운 삶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때로는 그런 그들의 집시로의 삶이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 19세기 후반이 되어 이른바 현대성modernity이 추구되던 시기, 바야흐로 예술가들이 진정한 예술가로 변신하면서 오로지 자신만의 느낌과 개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기존의 ‘교묘하게 재생산’ 하던 전통적 방식에 의한 기법 적용을 멈추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창의성과 자유를 더욱 소중하게 여기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런 과정에 집시가 상징하던 ‘자유로운’ 삶의 방식이 그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집시들의 ‘낭만적’ 특성을 지닌 예술가와 지식인을 ‘보헤미안’이라고 칭하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당시 두텁게 형성되는 중산층과는 다른 가치관을 갖고, 독립적이면서 스스로 방황의 길을 택하여 사회적 관습과 동떨어진 삶을 살던 사람들이었다.

예술가가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한 세기가 더 지난 오늘날에도 그런 방식의 삶을 사는 예술가들을 더러 발견하게 된다. 무질서하며 사회와 동떨어진 듯 어쩌면 ‘오해 속의’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자유와 개성이 있다. 아울러 그렇게 이루어 낸 작품의 ‘진실성’(authenticity) 또한 가볍게 볼 수 없다.

카임 수틴(Chaïm Soutine, 1893~1943)은 러시아 민스크자치주(Minsk Governorate)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지금 그곳은 리투아니아(Lithuania) 땅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여 빌리누스(Vilnius)의 작은 미술학교에서 기초를 닦은 후 1913년 파리로 와서 페르낭 코몽의 지도로 국립미술학교에서 배웠다.

그렇게 수업을 받으면서 루브르미술관에서 엘 그레코(El Greco), 렘브란트(Rembrandt), 고야 및 쿠르베 등으로부터 영감을 받아서 그랬는지 그의 초기 작품은 누구보다 더 아카데미파의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차츰 격렬한 생명감을 묘사하기 시작하면서 발광하는 듯한 붓터치를 내세울 정도로 크게 변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철저히 ‘보헤미안적’ 시도였다고 새롭게 평가했고 수틴은 그런 방식을 밀고 나갔다.

그는 심지어 썩은 고기를 그리는 시도(Carcass paintings)를 하여 동네 주민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하는 등 물의를 일으켰는데 사실 그런 시도는 고전파 이전 여러 화가에게서도 볼 수 있었다.

한동안 그와 그의 친구들은 개성 있는 그림을 그리고자 분투하던 가난한 예술가들의 거주지 몽파르나스 라 루셰(La Ruche)에서 살았는데 그곳에서 그는 모딜리아니와 친구가 되었다. 그리하여 모딜리아니는 여러 번에 걸쳐 수틴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지금 보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미술상이었던 레오폴드 즈보로프스키(Léopold Zborowski)가 살던 아파트에서의 모습이다.

나찌 독일에 의한 프랑스 점령이 이루어지자, 유태인이었던 그는 게슈타포(Gestapo)를 피하여 도망을 쳐야 했고 그러면서 무척 많은 날을 숲속을 비롯한 야외에서 잠을 자야만 했다.

그러면서 얻은 심각한 위궤양이 위출혈로 이어져 고통스러운 상태에 빠진 그는 응급 수술을 위해 파리의 안전한 곳으로 돌아왔지만,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그때가 아직 나찌 독일 치하였던 1943년 8월의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파리 몽파르나스 공동묘지(Cimetière du Montparnasse)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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