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로 읽는 세계사⑩] 찰스 1세와 올리버 크롬웰

제임스 1세의 초상(King James I of England), John de Critz, c. 1605, 196 x 120 cm, Museo del Prado, Madrid

독신으로 살았던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에게는 당연히 자식이 없었다. 따라서 그녀는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6세 (James VI, 1566~1625)를 자신의 후계자로 결정하는 유언을 남기며 세상을 떠났다.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에서는 국왕 제임스 1세(James I, 1566~ 1625)로 즉위했는데 사실 잉글랜드의 국내 사정과 정치적 환경을 잘 모르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는 종교갈등으로 스코틀랜드에서 축출된 후 잉글랜드로 망명했다가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하여 반역죄로 처형된 스코틀랜드의 매리 1세(Mary, Queen of Scots)의 아들이기도 했다.

또한 그의 즉위는 헨리 8세의 아버지 헨리 7세(Henry VII, 1457~1509)가 시작했던 튜더왕조(House of Tudor)에 이은 스튜어트왕조(House of Stuart)의 시작이었다. 스튜어트 왕가는 14세기부터 스코틀랜드의 왕실이었으며, 이는 스코틀랜드의 최고 궁내관직(Steward)의 별칭(Stewart/Stuart)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그리하여 강력한 왕권신수설에 입각한 군주제를 주장한 제임스 1세는 지속적으로 잉글랜드 의회와 충돌을 일으켜 반대하는 의원들을 체포했고 이어지는 차기 의회를 해산시키는 무리수를 두었는데 그런 방식이 아들 찰스 1세에게 이어지면서 국왕과 의회와의 갈등은 자꾸만 커졌다.

찰스 1세의 초상(Portrait of King Charles I in his robes of state), Anthony van Dyck, 1636, 253.4 x 153.6 cm, Royal Collection, London

제임스 1세의 아들 찰스 1세(Charles I, 1600~1649) 역시 왕권신수설을 굳게 믿으면서 신하와 의회 의원들을 강력하게 탄압했는데 그런 와중에 스페인과 전쟁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때 국왕은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세금을 걷어야 했는데 이를 위한 의회의 승인이 필요했고, 당연히 의회는 자신들을 탄압하고 있는 국왕의 의도대로 순순히 응해줄 리 없었다.

1628년 결국 의회가 이전에 요구했던 ‘권리청원(權利請願, Petition of Right)’을 찰스 1세가 받아들이자 의회는 국왕의 세금 부과에 동의했다. 문제는 찰스 1세가 세금 징수에 성공한 후 의회의 ‘권리청원’에 대하여 일방적으로 무효로 선언하고 의회를 해산했다는 사실이다. 이후 11년간 그는 아무런 견제 없이 무소불위의 왕권을 휘둘렀다.

그러는 가운데 1639년 찰스 1세는 개신교의 장로파를 국교로 믿던 스코틀랜드에 대하여 잉글랜드 성공회식 성찬 전례를 강요하자 이에 분노한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에 대한 전쟁을 선언했다. 그렇게 시작한, ‘주교 전쟁(Bishop’s Wars)’으로 불린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도 역시 비용이 문제였다. 따라서 찰스 1세는 해산되었던 의회를 재소집했지만, 의회는 그동안 누적된 국민의 불만을 먼저 처리할 것을 주장했다.

그런 반발에 다시 화가 난 찰스 1세는 또다시 의회를 해산하고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했지만 스코틀랜드에 패배했다. 그 결과 엄청난 금액의 전쟁배상금 부담을 짊어지고 말았다. 배상금을 위하여 국왕은 다시 의회를 소집했는데 의회는 이전의 모습과 달리 강경한 물리력을 행사하면서 전쟁 중 국왕의 편에 섰던 귀족들을 찾아내 살해하기까지 했다.

의회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국왕에게 3년마다 정기적으로 의회를 개최하는 법안과 의원의 동의 없이 의회를 해산할 수 없도록 하는 법안을 받아들일 것과 국왕의 임의로 징수하는 선박세 등의 수정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렇게 국왕을 압박한 의회는 급기야 프랑스 출신 왕비 헨리에타 마리아(Henrietta Maria of France)가 아일랜드에서의 카톨릭 신자들의 반란과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며 탄핵을 요구하는 등 그 압박 정도를 높여만 갔다. 이에 왕권에 심각한 위협을 느낀 찰스 1세는 근위병 400명과 함께 의회로 진입하여 자신을 비판한 의원들을 체포하고자 시도했으나 그들의 도주로 실패하고 마는데 그리하여 의회와 국왕 사이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한편, 카톨릭의 일파였던 예수회(Societas Iesu)는 개신교를 포용하면서 카톨릭 억압정책을 폈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제거하려다 1585년 잉글랜드에서 추방당했지만 이후 지속적으로 잉글랜드를 카톨릭 국가로 만들기 위하여 왕당파와 손잡고 크고 작은 내란과 반란을 모의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내전이 벌어지자 이에 개입한다.

올리버 크롬웰의 초상(Oliver Cromwell), Samuel Cooper, 1656, 75.6 x 62.9 cm, National Portrait Gallery, London

내전이 시작되던 1642년 찰스 1세는 해외에서 모집한 용병들로 인하여 압도적인 병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1645년 의회파를 이끌던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이 이끄는 기갑 기병대가 1646년 6월 옥스퍼드를 함락시키자 전세는 결정적으로 의회파로 기울고 말았다.

1647년 전쟁에 패배한 찰스 1세는 고향인 스코틀랜드로 피신했지만, 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던 스코틀랜드는 40만 파운드를 받고 그를 잉글랜드 의회파에 넘겼고, 포로가 된 찰스 1세는 와이트섬(Isle of Wight)에 유배되었다. 결국 1649년 1월 30일 잉글랜드 의회는 찰스 1세를 대역죄인으로 판결하여 처형하였다.

그런 다음 공화정을 선포하고 ‘잉글랜드 연방(잉글랜드 공화국, Commonwealth of England)’을 수립하였으며, 전쟁에서 결정적 공헌을 한 올리버 크롬웰을 호국경(Lord Protector)으로 선출했지만 이후 잉글랜드 연방의 진전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1651년 그렇게 의회파가 왕당파에 승리한 이후, 의회파는 다시 평화파와 독립파로 분열되었다. 이때 독립파의 지지를 받은 호국경 크롬웰 역시 갈수록 의회와 마찰을 빚게 되었고 결국 그 역시 의회를 해산시키고 말았다. 이후 1658년에 크롬웰이 사망하면서 공화정은 붕괴되었는데 소위 잉글랜드 연방 역시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의 사망과 함께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결국 당시 여러 정파는 심사숙고 끝에 어떠한 권력 집단에게도 절대적인 권력을 실어주지 않기 위해 왕정복고를 결정하고 말았다. 그에 따라 프랑스로 망명해 있던 찰스 2세(Charles II)가 1660년 5월 런던으로 돌아와 국왕 자리에 올랐다.

찰스 2세는 즉위하자마자 부왕 찰스 1세 사형에 서명한 판사 중 살아있던 13명을 처형했고, 올리버 크롬웰의 무덤을 파헤쳐 부관참시(剖棺斬屍)하는 등의 보복을 감행했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