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철의 미술산책 29] 고흐 ‘늙은 농부의 신발’···생생한 삶의 현장·궤적
우리는 직업을 얻기 위할 때, 아울러 기업체나 기관 등에 입사할 때 이력서(履歷書, resume)를 쓴다.
이때 이력서의 한자어 첫 글자 이(履)의 뜻은 ‘신, 신발, 신발을 밟다. 신발을 신다. 신을 끌다’라는 뜻으로, 이력서는 바로 ‘신발을 밟고 지내 온 역사’라는 뜻이다. 쉽게 말하자면, ‘일하며 지낸 기록’이라는 의미가 된다.
여러 차례 언급했던 대로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의 그림에는 무척 많은 시그니쳐(signature) 세상이 만들어졌다. 즉 그만의 독특한 그림들로, 해바라기가 그렇고, 별이 빛나는 밤, 삼나무, 밀밭, 꽃이 핀 과수원, 많은 자화상 등을 비롯하여 신발 그림 역시 그만의 스타일이자 독보적인 모습으로, 적지 않은 수를 남겼다.
그가 남긴 신발 그림들은 모두 헤어진 실밥에 위쪽이 휘어져 찌그러졌고, 신발 끈은 묶어지지 않아 풀어졌으며 가죽은 낡은 데다가 오래 신었던 까닭에 어딘가 형태에 변형이 온 상태이다.
그럼에도 그의 신발들은 마치 잠시 벗어놓은 상태가 되어 다시 일하러 들판으로 나가려는 듯한, 당연히 가지런하지도, 잘 씻어 반질거리지도 않고, 먼지까지 묻어 그리 청결해 보이지도 않는다.
그가 그린 신발들은 거의 구제품 시장에서 사온 것 아니면 자신이 신던 것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또는 살았던 어떤 사람의 자취를 가슴 깊이 느껴보고자 하는 통찰의 형식이자 형태이면서 가장 중요한 ‘삶’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생각해 보면, 신발만큼 우리의 일상에서 실질적이고 현실적이며 치열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없다. 자세히 그리고 눈여겨보면 신발은 생생한 삶의 현장을 담고 있으며 그렇게 남겨진 모습에 따라 그것의 주인이 겪어온 삶의 궤적을 감지해볼 수 있는데 반 고흐가 그린 신발에서는 그렇게 살아온 삶의 결과물이 잔인하도록 가슴아프게 만드는 상태로 전달되고 있다.
화가가 룩색(rucksack)을 매고 캔버스, 화구통, 야외 이젤 등을 들고 햇살이 내리쬐는 태양 아래를 헤맬 때 병약했지만 목표가 뚜렷했던 그를 지탱해주었던 것이 바로 그의 신발이었다.
그는 자연 속에서 마치 진리를 위한 투사처럼 이상적이며 인상적인 이미지를 만들기 위하여 수없는 공간 속을 걷고 또 걸었다. 그곳은 히쓰(heath)가 무성했던 고향 근처의 황량한 들판이었고, 언젠가는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들겠다며 의지를 불태우던 파리와 그 주변 센강이었고, 남프랑스 아를의 꽃이 핀 과수원이었다. 그리고 머리를 쪼아대듯 뜨거운 태양이 부서지고 있던 7월의 하늘 아래 결국 권총을 꺼내 자신의 배에 발사한 오베르(Auvers-sur-Oise)의 밀밭이 바로 그가 그의 신발에 의지한 채 구도(求道)의 길로 삼았던 곳들이다.
반 고흐의 첫 번 신발 작품은 파리에서였고, 지금 보고 있는 그림은 아를에서의 것으로,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가 살던 노랑 집(Yellow House) 바닥의 붉은 타일 위에 그려진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림에 대한 설정은 물론 신발의 소유자도 쉽게 알 수 있게 하고 있지만, 이 ‘늙은 농부의 신발(old peasant’s shoes)’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는 정물화 속 주인공은 1888년 늦여름 반 고흐가 초상화를 그린 파시언 에스칼리에(Patience Escalier)일 수도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반 고흐는 1888년 8월 생 레미(Saint R?my)에서 ‘한 켤레의 나막신(a pair of clogs, Van Gogh Museum, Amsterdam)’ 역시 완성했다.
그는 아를로 오기 전 파리에서 신발 한 켤레를 구제품 시장에서 가져와 다섯 점의 작품으로 만들었는데 이들은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과 브뤼셀의 개인 소장(Schumacher, Brussels), 볼티모어 미술관(Baltimore Museum of Art) 및 매사추세츠 캠브리지의 포그 미술관(Fogg Art Museum)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