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로 읽는 세계사⑨] 엘리자베스 1세…잉글랜드왕국을 대영제국으로

무적함대 초상화(The Armada Portrait), George Gower, c.1588, 110.5 x 125 cm, Woburn Abbey, Woburn, Bedfordshire

엘리자베스 1세의 초기 초상화에서도 당시 보는 이들에게 의미 전달을 하기 위한 장미, 기도서와 같은 상징적 물건들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후기 초상화에서는 자신의 제국을 나타내는 것들(지구, 왕관, 검, 기념 기둥)과 달, 진주와 같은 고전적 순수함이 복합적으로 나타나 있다. 이런 이면에는 ‘처녀 군주(Virgin Queen)’를 표현하고자 하는 뜻도 담겨있었다.

아버지 헨리 8세 때부터 튜더(Tudor) 왕실에서는 초상화 전통이 생겨났는데 우선 채색필사본(illuminated manuscript)에서 이루어진 전통에 따른 초상화 미니어처(miniature)를 들 수 있다. 이 작은 인물 이미지는 매우 힘든 과정을 거쳐 양피지 위에 수채화로 그려진 다음 딱딱한 카드놀이 판 위에 접착되어 굳혀진 것이었다. 유화로 그려진 패널(panel)화는 철저히 준비된 소묘 위에 실물 크기로 그려졌다.

잉글랜드 궁정에서의 초상화는 외국 군주에게 선물로 주고자, 또는 드물게 예비 구혼자에게 보여주기 위한 용도로 제작되었다. 이후 궁정은 여왕에 대한 그들의 헌신을 보여주기 위해 매우 상징적인 그림을 의뢰했으며, 엘리자베스 시대 후반기 잉글랜드 각 지방의 세련된 갤러리들에서는 초상화 세트로 가득 차 있었다.

튜더 왕조 시기 화가들의 스튜디오는 격동의 시기에 왕위에 대한 충성과 존경을 위한 중요한 상징으로 그녀의 이미지를 원하는 많은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묵시적으로 규정을 만들어, ‘승인받은 얼굴 패턴(approved face patterns)’ 또는 인정받은 여왕의 그림을 작업하여 내놓았다.

당시 영국 초상화가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인상적인 초상화 제작 기준은 16세기 전반부의 뛰어난 북유럽 플랑드르 화가인 한스 홀바인 2세(Hans Holbein Younger)가 그린 많은 초상 작품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잉글랜드 궁정에 실물 크기의 전신(全身) 초상화를 익숙하게 느끼도록 제작했던 대단했던 화가 홀바인의 작품 원본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1698년에 파괴된 화이트홀(휘트홀, Whitehall) 궁전에 있는 그의 위대한 왕조 벽화 등과 더불어 다른 원본 대형 초상화들 모두 엘리자베스 시대 작가들은 친숙했을 것이다.

이어 1570년대부터 여왕에 대한 숭배 분위기가 서서히 만들어졌는데, 왕립초상화 미술관장을 역임했던 미술사가이자 여왕 초상화 전문가 로이 스트롱 경(Sir Roy Strong)은 이를 두고 글로리아나의 숭배(The cult of Gloriana, 글로리아나는 여왕의 별칭이다)의 시작이었다고 규정한다. 그는 그것이 공공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교묘하게 만들어졌으며, 더욱이 종교개혁 이전에 있었던 사이비 종교, 동정녀 숭배, 성인 숭배 등 일련의 카톨릭 또는 관련 이미지, 의식, 행사와 같은 세속적 행위들을 대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리하여 여왕 즉위 기념일의 화려함, 궁정의 축시, 엘리자베스의 가장 상징적인 초상화 등으로 그녀에 대한 숭배 분위기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했던 여왕의 이미지 관리와 홍보는 그녀의 통치 마지막 10년 기간에 절정에 다다랐으며 나이가 든 여왕의 사실적인 이미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현실을 무시한 채 영원히 젊어 보이도록 만드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런 과정에 나타난 기준과 양식은 1585년경의 단리 초상화(the Darnley Portrait)가 시작이었는데, 이것의 특징은 우선 여왕 옆 탁자에 왕관과 홀(笏, sceptre)이 있으며, 나중에 다시 제작되면서 추가되었던 것들로는 착용을 하되 들고 있지 않는, 튜더 왕가 소품들에 의한 왕권 상징물의 등장이었다.

여왕은 1570년 교황 비오 5세(Pope Pius V)에 의하여 파문을 당하면서 스페인의 필립 2세와의 갈등이 고조되었는데, 이는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자 굳건한 가톨릭교도였던 매리 1세(Mary, Queen of Scots)가 잉글랜드에서 사망하면서 최고로 치달았고 그러했던 긴장과 경쟁은 수십 년 동안 지속되어 신대륙의 발견과 정복을 위한 바다와 육지에서, 그리고 그 결과 스페인 함대의 침공으로 절정에 달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 대양의 지배권을 기반으로 한 제국의 깊은 의미를 담은 여왕에 대한 시리즈 중 첫 번째 초상화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처녀성을 지닌 여군주를 나타내는 상징이 결합되어 그녀가 운명적으로 개신교 수호자이기도 한 그림이었다. 그렇게 이루어진 ‘대양의 처녀이자 황녀(The Virgin Empress of the Seas)’의 이미지는 황금시기의 도래(Return of the Golden Age)와 그 궤도를 함께 한 것이다.

그렇게 이루어진 ‘무적함대 초상화(The Armada Portrait)’는 1588년 스페인 함대를 패배시키면서 제국의 상징으로 떠오른 여왕을 묘사한 우화적 패널화이다. 그것은 석 점의 초상화로 남아 있으며 관련한 몇 점의 회화 역시 볼 수 있는데, 베드퍼드 공작(Dukes of Bedford)의 영지 중심에 있는 워번 수도원(Woburn Abbey)의 버전은 오랫동안 1581년에 고위직 화가로 임명된 조지 가우어(George Gower)의 작품으로 알려졌다.

여왕에 대한 도상학(iconography)적 이미지들이 가능하게 만들었던 다양한 신화와 상징주의는 스페인 함대를 물리친 이후 몇 년 동안 엄청나게 여럿으로 뒤섞인 장식용 직물 작품으로도 나타났다. 시, 초상화 및 노천 행사 등에서 여왕은 정의로운 처녀인 아스트라이아(Astraea)임과 동시에 사랑의 여신 비너스(Venus)로까지 찬미되었다.

이어진 디츨리(Ditchley) 초상화는 은퇴했지만 언제나 여왕의 대단한 옹호자였던 디츨리의 헨리 리 경(Sir Henry Lee)의 옥스퍼드셔(Oxfordshire) 집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1592년 여왕이 이틀간 디츨리를 방문한 기념으로 제작되었을 것이다.

이 그림은 마커스 지어래츠 2세(Marcus Gheeraerts the Younger)의 작품으로, 화가의 후원자인 리가 여왕의 행차에서 만들었던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미지에서 여왕은 잉글랜드 지도 위에 서 있는데 그녀의 발은 옥스퍼드셔에 있다. 그림은 잘렸고 배경은 제대로 잘 그린 편이 아니라 설명문과 단시(sonnet)가 불완전하다.

배경에는 폭풍이 몰아치지만, 그녀 앞에서 태양이 빛나고 있으며 왼쪽 귀 언저리에 천체(celestial) 또는 천구 형태의 보석을 착용하고 있다. 이 그림의 적지 않은 버전은 아마도 지어래츠 2세의 작업실에서 우화적인 부분이 제거되었고 엘리자베스의 특징인 원본에 있는 극도의 사실주의적 얼굴이 보다 ‘부드러워진’ 상태로 제작된 것 같다. 그 중 하나가 투스카니 대공(Grand Duke of Tuscany)에게 외교 선물로 보내져 지금은 프렌체 피티 궁전(Palazzo Pitti)에 있다.

1596년을 비롯하여 1603년 여왕의 사망 사이 날짜가 남아 있는 초상화에는 나이 든 여왕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원래의 모습과 충실한 유사성은 1597년 앙드레 위로 드 메스(Andr? Hurault de Maisse)가 1597년 프랑스 앙리 4세(Henry IV)의 특명대사(Extraordinary Ambassador)가 되어 65세의 여왕과 함께 궁정인들을 만난 후 작성한 보고서에서 볼 수 있듯이 동시대인들의 기록에서만 찾을 수 있다.

그후 거의 모든 이미지가 1590년대에 니컬러스 힐리아드(Nicholas Hilliard, 여왕 즉위 초창기 세밀한 초상화를 그렸던 금세공가)가 처음 고안했던 여왕의 얼굴 형식을 따르고 있는데 이는 엘리자베스에게 항상 젊음을 유지하도록 ‘젊음의 가면(Mask of Youth)’을 씌운 것이라고 미술사학자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힐리아드와 그의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약 16점의 세밀화(miniature portrait)는 이 얼굴 모형을 기반으로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의상과 보석의 다양한 조합이 실제에서도 그렇게 그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것들을 궁정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던 화가들 역시 채택(또는 시행)했던 것이다.

그리고 대관식(The coronation) 예복을 입은 엘리자베스의 두 초상화가 1600년 또는 그 직후의 작품으로 남아 있다. 하나는 유화로 그려진 패널 초상화이고 다른 하나는 힐리어드가 그린 미니어처화이다.

끝으로, 마커스 지어래츠 2세가 그린 것 중에서 아마도 여왕의 가장 상징적인 초상화는 허트필드 하우스의(Hatfield House)의 무지개 초상화(Rainbow Portrait)일 것이다.

작품은 여왕이 60대였던 1600년에서 1602년경 것으로, 이 그림에서 여왕은 마치 나이를 초월한 듯이 가면을 쓴 것과 같은 모습에 봄꽃으로 수 놓은 린넨으로 된 의상과 한쪽 어깨에 외투를 걸치고 환상적인 머리 장식과 느슨한 머리카락을 드러내고 있다.

그녀는 눈과 귀를 가릴 수 있는 망토를 입고 있으면서 지혜의 뱀, 천공과 천구를 포함한 인기 있는 문장(emblem) 서식에서 찾아낸 상징을 착용하고 ‘non sine sole iris(태양 없이는 무지개가 없다)’라는 구호로 무지개를 실어 나르고 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이룬 역사적인 업적은 우선 종교분쟁을 지혜롭게 해소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그녀가 취했던 중용정책은 성공회 중심으로 개혁을 이룬 보편적 교회(Reforming Catholic Church)로 설명되는 고유의 정체성을 갖게 하였다.
경제정책에서는 모직물 공업을 육성하고 장려하였기 때문에 농촌을 중심으로 급속히 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으나, 양을 키우기 위해 목초지를 확대한 인클로저(Enclosure)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면서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들이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일이 벌어져 치안에 문제가 생겼다.

당시 농지를 잃은 농민들의 방황은 심각해서 토머스 모어(Thomas More)는 저서 ‘유토피아(Utopia)’에서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자 여왕은 사회복지정책의 일환으로 구빈세(救貧稅)를 실시하여 빈민구제법과 함께 적용했다.

그러나 그녀의 위대한 외교적인 치적은 스페인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게 만들었던 일이다. 그녀는 잉글랜드의 국력이 스페인과 프랑스와 비교하여 한참 못 미친다는 사실을 잘 파악하여 표면적으로는 세력 균형 정책을 펴면서 음으로 양으로 해적 프랜시스 드레이크(Sir Francis Drake) 등을 지원하여 스페인 견제에 나섰다. 이어 네덜란드의 독립 전쟁에서는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를 지원했는데, 이에 따라 스페인과의 관계가 파경을 맞았고 두 나라는 숙명의 라이벌이 되었다.

상복을 입은 매리 스튜어트(Mary, Queen of Scots in white mourning for her husband), Fran?ois Clouet. c. 1560, 37.5 x 26.5 cm, Mus?e Carnavalet, Paris

그 무렵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자 카톨릭을 믿는 매리 스튜어트가 개신교 신도들이었던 귀족들의 반란으로 아들인 제임스(James I, 엘리자베스 1세가 세상을 떠난 후 잉글랜드 국왕 제임스 6세를 겸함)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1568년 잉글랜드로 망명하였다. 매리 스튜어트는 그 후 약 20년 동안 자신이 헨리 8세 누나의 적자임을 내세우며 엘리자베스 1세를 축출하고 왕위를 차지하고자 계속 음모를 꾸몄다. 그러다가 매리는 여왕 암살에 대한 모의였던 배빙턴 사건(Babington Plot)의 전모가 드러나 1587년 2월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스페인의 필립 2세(Portrait of Philip II of Spain), Sofonisba Anguissola, 1573, 88 x 72 cm, Museo del Prado, Madrid

이 일은 스페인에게 잉글랜드를 침공하고자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어 결국 1588년 7월 필립 2세(Philip II)의 무적함대 130척이 영국해협에 나타났다. 그러나 스페인 함대는 잉글랜드 함대에게 크게 괴멸을 당하여 스코틀랜드 방향으로 퇴각하다가 북해에서 폭풍우를 만나 상당수가 파손, 침몰되었고 오직 53척만이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잉글랜드는 이처럼 이어진 외국과의 결전 속에서 국민의 정신적 결속과 일체감을 이루었고, 또다른 한편으로, 여왕 시대는 국민 문학의 황금기가 되기도 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문학과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경험 철학 역시 이때 나타났다. 아울러 당시 잉글랜드인들 많은 수가 집에서 악기를 즐겼을 정도로 문화의 꽃이 피었다.

식민지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독신 여왕을 기념하는 속주 버지니아(Virginia)가 만들어졌고 아시아에서는 식민지 경영관청인 동인도회사를 창설하여 그 세력을 확장시켜 훗날 잉글랜드 왕국이 대영제국으로 발전하는 데 필요한 발판을 만들었다.

이 시대를 훗날 사람들은 ‘엘리자베스 시대(Elizabethan era)’라고 부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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