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로 읽는 세계사④] 헨리 8세의 ‘진실한 부인’ 제인 시무어
헨리 8세는 소위 말하여, 장자(長子) 상속이나 아들을 갈망한다는 구실로 왕비들을 수차례 바꾼 국왕으로만 알게 되는데 그렇다고 국정에 소홀했던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사냥, 마상 창 겨루기, 춤, 시 쓰기 등 각종 운동과 예능에 소질이 있던 그는 라틴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등을 자유롭게 구사하며 당시의 석학들과 철학, 천문학과 신학 등을 수시로 토론할 정도였다. 이를 두고 당시 최고의 지성이었던 네덜란드의 대학자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역시 그를 칭찬했다고 한다.
그의 대표적인 치적 중 하나로, 외교 능력을 기반으로 한 국력 신장을 들 수 있다. 즉 그는 군사력을 동원한 실력행사로 국가의 위상을 드높인 왕이었다. 집권 초기 로마 교황청과 신성로마제국과의 동맹을 맺어 프랑스의 루이 12세(Louis XII)에 맞서 전쟁에 돌입하여 승리했으나 적지 않은 국고를 탕진한다. 이때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4세(James IV)가 자신의 누나(Margaret Tudor)와 결혼한 사이였으면서도 프랑스 편을 들어서 결국 헨리는 그들 역시 손보게 된다.
국경에서 벌어졌던 플로든 전투(Battle of Flodden)에서 매형이었던 스코틀랜드의 국왕을 포함한 귀족 등 1만명의 스코틀랜드군을 거의 전멸시키고 에든버러(Edinburgh)까지 유린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 전투의 패배로 스코틀랜드는 거의 회복 불능 상태에 빠진다.
1536년에는 웨일스(Wales)를 완전히 잉글랜드왕국에 흡수시켰고 1541년에는 대대로 아일랜드 총독을 독점하며 반독립상태였던 킬데어 가문(Kildare family)을 소환하여 가두면서 아일랜드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그 결과 더블린 의회에서 ‘아일랜드의 왕’ 칭호를 수여 받는데 이리하여 헨리 8세는 브리튼섬 전체와 아일랜드섬까지 아우르며 향후 편성될 강력한 대영제국으로의 기초를 닦는다.
헨리 8세는 두 번째 왕비 앤 불린(Anne Boleyn)을 처형시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를 모시던 시녀 제인 시무어와 약혼을 한 후 불과 10일 후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의 입장이 되어 살펴보면, 제인 시무어는 그야말로 애타게 찾던 운명의 여인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세 번째 결혼을 감행하던 1536년 그는 웨일스를 잉글랜드에 합병시키는 문서에 승인하였다. 이로써 잉글랜드와 웨일스는 강력한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이듬해인 1537년 제인은 훗날 에드워드 6세(Edward VI)가 되는 에드워드 왕자를 낳았다. 하지만 그 과정이 엄청난 난산(難産)이었기 때문에 그 후유증으로 1537년 10월 24일 그리니치 궁전(Greenwich Palac)에서 죽고 만다. 제인의 죽음 후, 헨리 8세와 전 왕실은 오랜 애도의 시간을 가졌다.
엄청난 비탄 상태에 빠진 헨리는 그녀만을 자신의 ‘진실한’ 아내로 생각했는데, 그 이유를 그토록 원하던 아들을 낳아 주었기 때문이랄 수 있지만 그렇게 숙원을 풀어준 제인을 두고 일종의 운명의 여인과 다름없는 영원한 존재로 여겼을 수 있다.
제인 시무어(Jane Seymour, 1508~1537)는 공식적으로 헨리 8세의 제2 계비이다. 그녀는 이미 언급한 대로 제1 계비 앤 불린을 옆에서 모시고 있을 때 헨리의 눈에 들었다. 그리하여 1536년 5월 17일 앤 불린에 대한 사형이 집행된 지 11일 만에 두 사람은 혼인을 했던 것이다.
제인은 군인 출신 귀족인 존 시무어 경(Sir John Seymour)과 마저리 웬트워스(Margery Wentworth)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존 시무어 경은 헨리 7세와 헨리 8세 집권 기간에도 현역이었다.
그리고 제인의 외증조모는 플란타지넷 왕가(House of Plantagenet) 에드워드 3세(King Edward III)의 차남인 리오넬 앤트워프(Lionel of Antwerp, 1st Duke of Clarence)의 후손이기도 했다.
그녀 역시 전임 왕비들이었던 아라곤의 캐서린(Catherine of Aragon)과 앤 불린처럼 최고의 교육을 받아 읽고 쓰기에 능숙했고 특히 바느질 솜씨에 뛰어났다. 그녀가 놓았던 수예 작품들은 1652년경까지 남아 있었는데 이는 세이무어 가문의 보물로 여겨졌고 이를 본 헨리는 ‘타고난 멋진 수예가’로 감탄을 했다고 한다.
그녀는 1532년 캐서린의 시녀가 된 후 여동생 엘리사베스(Elizabeth Seymour, 나중에 헨리 8세의 총리 토마스 크롬웰의 아들 그레고리와 결혼)와 더불어 다음 왕비였던 앤 불린을 모시게 되었다. 그녀에 대한 헨리의 관심은 앤 불린이 처형되기 3개월 전이던 1536년 2월부터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녀는 그때부터 이미 궁정 귀족들을 비롯한 여러 구성원으로부터 ‘지금까지 보아온 여인 중 가장 괜찮은’ 사람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금발 머리에 창백한 얼굴, 조용하고 자신에게 엄격했던 제인은 정열적이며 다소 화려했던 갈색 머리의 앤 불린과는 여러모로 대조적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신의 시녀들에게 프랑스식 복장을 버리고 정숙한 잉글랜드 방식 옷차림을 하도록 바꾸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제인 시무어는 국왕의 첫 번째 왕비였던 캐서린의 딸 매리 공주(Mary I, Mary Tudor)를 서자에서 적자의 신분으로 돌려 놓아줄 것을 왕에게 부탁했지만 헨리 8세는 이를 두고 딸 매리가 반역을 시도했다고 여겨 오히려 딸과 그녀의 지지자들을 법정에 세워버렸다.
이로 인해 열린 재판에서 공주가 왕의 결정을 존중하며 종교개혁을 받아들이자 시무어의 부탁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때 제인이 헨리 8세 자신 스스로 가톨릭으로 복귀할 것을 종용하자 국왕은 앤 불린의 죽음을 그녀에게 상기시키며 거부하고 말았다.
제인 시무어는 1537년 10월 24일 헨리 8세가 그렇게 고대하던 왕자 에드워드 6세를 낳은 지 12일 만에 산욕열로 숨을 거두었다.
이후 헨리 8세는 제인 시무어만을 두고 ‘나의 진실한 부인(My true wife)’이라 불렀다. 그러면서 그는 이후에 세 명의 왕비를 더 맞아들이지만, 제인이 아들을 낳아서였는지 그녀만을 진실한 아내로 여겼던 것 같다. 결국 헨리 8세는 죽은 후 제인 시모어 옆에 묻혔다.
제인 시모어가 세상을 떠난 지 3년 후 헨리는 정치적인 이유로 독일인이었던 클레페스의 안네(Anne of Cleves)과 결혼한다.
제인 시무어의 초상화는 캐서린 왕비와 앤 불린의 초상화와 달리 독일 출신의 궁정 초상 화가 한스 홀바인 2세(Hans Holbein the Younger, 1497~1543)가 그린 것이다. 이어지는 네 사람의 초상을 그린 잉글랜드 행정청 휘트홀의 벽화(Whitehall Mural) 역시 홀바인 2세가 그린 것으로, 부모인 헨리 7세(King Henry VII)와 어머니(Elizabeth of York), 그리고 국왕 자신과 왕비 제인 시무어를 볼 수 있는데 원본은 1698년 화재로 소실되어 사라져 버렸다.
그것을 플랑드르(Flanders) 출신의 초상화가이자 유명 복제화가(copiest) 레미기우스 반 렘푸트(Remigius van Leemput, 1607~1675)가 다시 그린 것이다. 이 작품 역시 영국 왕실 초상화 중 매우 중요하고 유명한 그림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