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 루키] ‘밀월도 가는 길’ 양정호 감독

'밀월도 가는 길' 촬영 중 배우들과 이야기 중인 양정호 감독(가운데)

시애틀국제영화제·에든버러국제영화제에 초청

제5회 시네마디지털서울(CINDI) 신인상 수상

“은근히 계속 긴장하게 만드는 흔하지 않은 스토리 전개가 좋았습니다.(chohyuna7)”, “인상적인 데뷔작, 다음 작품도 기대됩니다.(sal_ulm)”

관객 평점 9.20. 양정호(38) 감독의 데뷔작 ‘밀월도 가는 길’에 대한 네티즌들의 평가다. 영화평론가 김영진 씨는 “저예산 규모에서 감당할 수 있으리라곤 믿어지지 않을 만큼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5000만원이라는 초저예산으로 제작된 ‘밀월도 가는 길’은 한국영화아카데미(KAFA)가 2007년부터 시작한 ‘제작연구과정’을 통해 탄생했다. 영화는 사람들이 사라지는 섬 ‘밀월도’에 대한 소설로 신춘문예에 당선된 동조(문정웅)가 소설의 아이디어를 제공했던 친구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는다. 학원폭력을 소재로 현실과 가상이 섞여 들어가는 구조가 흥미롭다.

지난해 제5회 시네마디지털서울(CINDI) 버터플라이상(신인상) 수상 후 3월 서울 대학로 CGV에서 개봉해 두 차례의 연장 상영, 지방 상영까지 이어졌다. 시애틀국제영화제(5월17일~6월10일), 에든버러국제영화제(6월20일~7월1일)에도 초청을 받았다. 마케팅도 없고 전국 개봉을 할 수 없는 열악한 상황에서 이뤄낸 성과라 놀랍다. 5월25일 ‘제12회 LGBT영화제’에서 다시 한 번 관객과 만난다.

양정호 감독은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고 말한다.

5월25일 ‘LGBT 영화제’서 상영

한국영화아카데미(KAFA)는 영화인 사관학교로 통한다. 봉준호, 장준하, 최동훈, 허진호, 임상수 감독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13일 만난 양정호(KAFA 21기) 감독은 이들의 뒤를 이어갈 충무로의 기대주로 손꼽힌다. 오랜 영화공부로 기본기가 탄탄하고 사물을 보는 눈이 남다르다는 게 주변의 평가다.

그동안 단편 <돼지 사라지다>(2003), <외출>(2004), <물 속의 사막>(2005)을 연출했으며, 2006년 <피는 물보다 진하다>로 베를린국제단편영화제에 초청됐다.

최근에는 안양예고에서 영화제작과 작품분석론을 강의한다. 시나리오도 직접 쓰는 등 영화이론과 제작 양방면에 능통한 ‘레알(Real)’ 감독이다.

양 감독을 영화로 이끈 것은 뭘까. “제가 고등학교 다닐 무렵인 90년대 초반은 한국영화의 황금기 진입단계였어요. 분위기가 영화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던 중 ‘토토의 천국’을 보게 됐는데 딱 꽂힌 거죠. 현실과 과거와 상상이 기묘하게 교차하는 영화였는데, 연달아 네 번을 봤을 정도니까요.”

밀월도 가는 길에서 ‘토토의 천국’이 보이는 이유다. 양 감독은 다음 작품으로 페이크다큐 형식의 영화를 준비 중이라고 했다. 시나리오는 출고됐고 제작사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이 영화 역시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독특한 형식의 영화가 될 것 같다.

“50년대 이탈리아에서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던 여 감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데 그 사건을 현재의 한 다큐멘터리 감독이 추적해 가는 내용입니다. 2년 전에 쓴 작품인데 내용 중 민간인 사찰이야기도 나오거든요. 얼마 전 민간인 사찰이 이슈가 됐을 때 묘한 느낌이 들었어요. 일찍 제작돼 나왔다면….(웃음)”

그의 카카오톡 창에는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라는 문구가 써 있다. 40~50대 중년 감독들의 마당인 된 한국 영화판에 양정호 감독이 몰고 올 바람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양정호 감독이 보내온 영화 입문 동기

‘토토의 천국’에 감동··· 누군가의 가슴 뛰게 만드는 영화 만들고 싶어??

(위)밀월도 가는 길 (아래) 토토의 천국

2년전 <밀월도 가는 길>의 초고를 쓸 때, 가장 많이 떠올린 것은 영화가 아니라 내 중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들이었다. 초고를 아는 친구에게 보여줬더니, 그 친구가 <토토의 천국>과 구성이나 정서가 비슷하다고 말했다. <토토의 천국>… 이건 내 인생의 영화였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밀월도 가는 길>의 대사처럼 우주에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 같다.

고3 여름방학 때, 공부가 너무 하기 싫고 앞으로 뭘 해야 할지도 몰라서 무작정 극장을 돌아다녔다. 내가 살던 인천에서 상영하는 영화는 모두 다 보고(이런 고3 생활을 하다니 내가 단단히 미치긴 했었다), 볼 영화가 없는데, 라디오 영화 프로그램에서 <토토의 천국>을 소개시켜줬다. 보고 싶었다. 그런데 인천에서는 상영하지 않았다.

여름방학 보충수업을 빼먹고, 무작정 <토토의 천국>을 보러 서울 강남에 있는 극장으로 향했다. 첫 회에 들어갔는데, 극장 안 관객은 나와 어떤 아저씨 단 2명. 평일이었으니 당연했다.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됐다. 현실과 과거와 상상이 기묘하게 교차하는 영화가 순식간에 끝났다. 그리고 내 눈엔 눈물이 주룩주룩… 멈추질 않았다. 이런 유럽 영화도 생소했을 뿐 아니라, 복잡한 전개에 내용도 다 파악하지 못했는데…. 영화는 내 가슴을 뒤흔들어 놓았다. 넋을 놓고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스크린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무작정 영화를 다시 보고 싶었다. 당시 인천은 좌석제가 아니여서 영화를 맘껏 볼 수 있었는데, 서울은 지정 좌석제였다. 직원이 극장 안을 확인할 때, 화장실에 몰래 숨어 있다가 다음회가 시작할 즈음 극장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렇게 <토토의 천국>을 연달아 4번 보고 말았다. 3번째 볼 때 영화의 내용을 속속들이 파악했는데, 영화적 감동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더욱 깊어지고 넓어졌다.

전철을 타고 인천에 내려오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일주일 내내 멍한 표정으로 지내다가 문득 영화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튀어 올라왔다. ‘운명’이란 것은 이렇게 자기도 모르는 알 수 없는 순간, 느닷없이 사람의 마음을 낛아채는 것 같다. 당시 이공계였던 나는 집안에 폭탄선언을 하고야 말았다. 영화를 하겠다고! 예술을 하면 굶어죽고, 딴따라 같은 놈들이나 영화를 하는 것이라는 아주 진부한 이야기가 나돌던 끝물의 시기였다. 집안을 한번 뒤집어엎고 나서야 허락이 떨어졌다.

<토토의 천국>을 보면, 토토가 자신의 비참한 인생의 원인으로 알프레드를 지목하고, 친구인 알프레드를 죽이겠다고 결심하는 장면이 인트로에 나온다. 영화는 늙은이 토토가 왜 알프레드를 죽이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는지를 세 가지 시제와 환상 장면의 교차를 통해 치밀하게 구성해나간다. 가족들이 함께 불렀던 노래 그리고 사탕, 장미 같은 오브제들이 드라마의 진행과 함께 반복되어 사용되다가 클라이맥스에서 감정의 폭발을 가져온다.

이런 이야기의 구성 장치나 소품의 활용, 음악의 인상적인 효과 등이 나의 뇌리에 무의식적으로 깊게 새겨진 것 같다. 데뷔작의 시나리오를 구성하면서 의식하지도 않았는데, <토토의 천국> 영향이 짙게 느껴졌고 시나리오를 수정하면서 가장 많이 참고한 영화이기도 하다. 데뷔작을 만들면서, 나로 하여금 영화를 하게 만든 영화인 <토토의 천국>을 나 자신도 모르게 모방하고 있었다는 점이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영화를 공부하던 시절이 아니라 아무 것도 모른 채 극장에서 보았던 시절의 영화들 중에서 나를 가슴 뛰게 만든 영화가 있다. 요즘 나는 그 시절의 영화들을 자꾸 꺼내 본다. 나에게 <토토의 천국>이 그랬듯이, 누군가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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