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가득한 한심’ 박노해 “양지바른 무덤가에 누워”

지금은 사라진, 서울 풍납토성 안 어느 무덤. 60년 양지바른 그곳을 2017년 3월 사라졌다. 

오늘은 한심하게 지냈다

일도 하지 않고 책도 읽지 않고

마루에 걸터앉아 우두커니

솔개가 나는 먼 산을 바라보고

봉숭아 곁에 쪼그려 앉아 토옥토옥

꽃씨가 터져 굴러가는 걸 지켜보고

가을 하늘에 흰 구름이 지나가는 걸 바라보고

가늘어지는 풀벌레 소리에 귀 기울이고

소꿉장난하는 아이들과 남편 배역을 맡아 하다가

목이 말라 우물가에서 심심한 물 한 모금 마시고

늘씬한 여자가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연노랑 빛 논길을 지나 고개 숙인 수수밭을 지나

양지바른 무덤가에 누워 깜박 졸다가

붉은 노을에 흠뻑 물들어 집으로 왔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 가득한 한심으로

기나긴 하루 생을 위대한 스케일로 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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