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우주의 가을 시대’ 박노해 “첫 서리가 내렸다”

서리 내린 나뭇잎

첫 서리가 내렸다

온 대지에 숙살肅殺의 기운 가득하다

하루아침에 찬란한 잎새를 떨구고

흰 서릿발 쓴 앙상한 초목들

나는 텅 빈 아침 숲에 서서

하얀 칼날을 몸을 떨며 바라본다

 

싸늘한 안개 속으로 태양이 떠오를 때

 

사과 밭으로 올라가는 나는

지금 두 다리 밑에 지구를 깔고

우주를 산책하고 있다

 

우주의 절기에서 가장 혁신적인 변화는

여름의 불火에서 가을 금金으로의 변화

 

언덕 위의 사과나무들은

언 서릿발에 뒹구는 낙과들 위로

살아남은 것들만 붉게 울고 있다

 

가을은 익어가는 계절만이 아니다

갈라내고 솎아내는 엄정한 계절이다

 

아 가을이 온다

우주의 가을이 온다

쭉정이와 알갱이를 가려내는,

참과 거짓을 한순간에 심판하는

우주의 가을 시대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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