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사람의 깃발’ 박노해 “나는, 슬프게도, 길을 잃어버렸다”
실크로드 사막 길의
거센 모래바람 앞에 서면
옷자락이 깃발처럼 펄럭인다
감싸인 몸도 마음도
휘청이며 펄럭인다
온몸을 던져
혁명의 깃발을 들고 살아온 나는,
슬프게도, 길을 잃어버렸다
이제 깃발도 없이
실패한 혁명가로
정직한 절망을 걸어온 길
무력한 사랑의 슬픔 하나로
이 막막한 사막 지평에 서면
바람이 크다
바람이 크다
거센 모래바람에 휘청이며
푹푹 빠지고 쓰러지며 가다 보면
다시 온몸으로 펄럭이며 가다 보면
때로는 사람이 깃발이 되는 것이다
깃발도 없이 길을 찾아가는
사람이 깃발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