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문화 3.0시대⑫] 상징주의: 물질 vs 정신세계 갈등 해소에 관심
[아시아엔=<아시아엔> 디자인 고문, 김인철 전주비전대 교수] 상징주의는 1880년대 후반 프랑스에서 시를 중심으로 시작된 문학운동을 말한다.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말라르메(St?phane Mallarm?), 랭보(Arthur Rimbaud) 등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상징주의는 물질세계와 정신세계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는 것을 주된 관심사로 삼았다. 상징주의 시인들은 시적 언어를 내면생활의 상징적 표현으로 여겨 화가들에게까지 신비성과 마술 등을 시각적으로 표현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상징주의 시각 이미지들은 인간의 내면을 강조하여 이루어진 비합리성을 추구함으로써 일상적인 이미지의 왜곡과 비사실적인 우화세계 및 이들의 기묘한 병치(竝置)를 일으키게 되었다. 현실적 주제보다는 신화적이고 신비한 주제를 써서 상상의 세계를 그리는 것, 그리고 어떤 감정이나 사고에 상응하는 조형세계가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 중요했다. 즉 해설이나 설명 없이 감정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시각 이미지에 대한 추구가 상징주의 화가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당시 시각 이미지에서의 상징주의는 쿠르베(Gustave Courbet)가 강력하게 주도한 사실주의를 뛰어넘어야만 했다. 이를 위한 첫걸음으로 시인 장 모레아(Jean Mor?as)는 1886년 9월 18일자 <르 피가로>(Le Figaro) 지에서 상징주의 선언을 발표했다. 그는 “예술의 본질적 원리는 사상에 감각적 형태를 씌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상징주의 미술에 대한 첫 언급은 고갱(Paul Gauguin)과 퐁타방파 및 나비파와 관련된 것이었으나, 점차 퓌뷔 드 샤반느(Pierre Puvis de Chavannes), 르동(Odilon Redon), 모로(Gustave Moreau), 카리에르(Eug?ne Carri?re) 등의 작가들로 이어졌다.
이들 작가에 대한 소개 역시 여러 간행물을 통해 출판되었다. <데카당>(D?cadant), <보그>(Vogue), <상징주의자>(Symboliste) 등이 1886년에, 이어 <메르퀴르 드 프랑스>가 1891년 출판되었다. 샤반느는 “명료한 사상 각각에는 그것을 번역하게 하는 시각적 사고가 각각 따른다”고 믿었으며, ‘회화의 말라르메’라고 불리운 르동은 “인간의 감성을 아라베스크한 것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모로는 앙리 마티스(Henry Matisse)와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를 비롯한 야수주의 작가들의 스승이 되었으며, 카리에르는 몽환적 내용을 무채색조로 그렸다. 상징주의자들은 새로운 회화양식을 창조한 것은 아니었으나, 예술적 형식보다는 시적 사상의 표현, 마술과 종교적 신비와 같은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 일종의 개인주의자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상징주의의 여러 개성들 중 앞서 언급한 데카당(decadant)한 모습은 이전의 어떤 유파에서도 볼 수 없었던 강력한 것이었다. 이렇게 급진적이면서도 퇴폐적인 것에 가까운 이미지를 유감 없이 발휘한 작가로 영국 출신 오브리 비어즐리(Aubrey Vincent Beardsley, 1872~1898)를 들 수 있다.
일본 목판화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강렬한 흑백의 드로잉을 그린 비어즐리는 어떤 작가들보다 더 퇴폐적이고 기괴하며 에로틱한 특징을 보여주었다. 그의 탐미적 추구는 당시 유명했던 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제임스 휘슬러(James McNill Whistler) 등과 같았다. 불과 25세에 결핵으로 요절했음에도 비어즐리가 아르누보(Art Nouveau)와 근대 포스터 형식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삽화로 일컬어진 일러스트레이션(illustration)의 세계를 새롭게 독자적으로 구축한 작가이자 아르누보의 대표적 퇴폐화가였던 그가 남긴 이미지의 대부분은 과감하고 대담하게 생략된 흑백이다. 도발적으로 에로틱하게 만들어간 스토리들의 주제는 역사와 신화에서의 역설을 보여주었다.
대표적인 이미지들로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의 희극 <리시스트라타>(Lysistrata)와 오스카 와일드가 지은 <살로메>(Salome)의 삽화를 들 수 있다. 그는 또한 만평가(caricaturist)라고도 불린 화가였다. 정치적인 풍자화와 프랑스 상징주의문학을 위한 여러 삽화를 매우 적절히 표현하여 1890년 이후 프랑스 포스터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그의 죽음은 프랑스에서 이루어졌고 장례식 역시 프랑스 지중해의 망통(Menton) 대성당에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