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 문화 3.0 시대 ②] 200년 피땀의 결실 ‘사진’ 누가 예술이 아니라 말할 수 있나?

[아시아엔=김인철 전주비전대 교수] 누구나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는 이 시대를 맞아 우리의 일상과 시각 이미지와의 관계에 대하여 고찰해본다.

길을 가거나, 사람을 만나거나, 밥을 먹거나, 회의를 하거나, 즐거운 시간 등을 가지면서 우리는 늘 사진을 찍는다. 심지어 셀카봉이란 것까지 몸에 지니고 다니며 이것저것 무수히 많은 이미지들을 찍어 자신의 스마트폰에 저장하며 살고 있다. 이제 우리는 원하는 이미지들을 얼마든지 소유하며 살게 되었다. 이는 정말로 새삼스러운 일상이다.

코린트의 아가씨
코린트의 아가씨

천재예술가 다빈치도 ‘한몫’
인류에게 어쩌면 해결하기 어려웠던 숙제 중 하나가 바로 소중한 이미지들을 영원히 간직하고자 하는 열망이었을지 모른다. 비단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차치하더라도, 우리 주변의 시각적 모습들은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었고 인류는 그런 이미지의 영속성(永續性·eternity)을 추구하여 그것들을 기록하고 영원히 간직하는 방법을 탐구해왔다.

이러한 시도들은 그리스의 일상을 남긴 한 그림에서 엿볼 수 있다. 그림의 제목은 ‘코린트의 아가씨’(The Corinthian Maid). 이것은 그리스 도기에 새겨질 부조를 위한 것으로, 젊은 여성이 남자 모델의 윤곽을 그리게끔 한 이미지이다. 그림에서 보듯이 당시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사람들과의 모습을 간직하고자 여러 방법을 시도해왔다. 그리고 이는 보이는 이미지들을 그대로 저장하는 기술(사진술)에 대한 시도로 이어졌다.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는 작은 구멍을 통과한 광선이 상(像)을 맺을 수 있다는 가설이 이미 세워졌고, 10세기의 아라비아 학자였던 알하젠(Alhazen)은 그 현상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암상자·暗箱子)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르네상스 시기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카메라 옵스큐라를 실제로 제작하여 바늘구멍 사진기의 구멍에 렌즈를 부착하게끔 한 진전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화가에게 캔버스나 종이 위에 투사된 이미지를 따라 그릴 수 있게 해주는 도구로 이용되었다.

그후 카메라 초점면에 우유빛 유리관이 있어서 밖에서 그림을 보게끔 한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 투명한 방)가 개발되었다. 1807년 윌리엄 하이드 울러스턴(William Hyde Wollaston)이 카메라 루시다의 특허를 획득하였다.

17세기경부터 유럽에서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를 이용한 암실이 휴대용으로 만들어져 텐트(tent) 형식으로 유행하였다. 렌즈를 통한 선명한 상을 카메라 옵스큐라의 내부에서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 장치는 멀리 떨어진 풍경의 감상 등에 이용되면서 한편으로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윤곽을 추적하여 그리는 일을 가능케 했다.

니엡스가 헬리오그래피 기법으로 만들어낸 사진 이미지
니엡스가 헬리오그래피 기법으로 만들어낸 사진 이미지

이렇게 이루어진 이미지들을 어떠한 방법으로든 평면에 정착시켜 기록하고자 하는 노력이 아울러 진행되었는데 1826년 프랑스인 조제프 니세포 니엡스(Joseph Nic?phore Ni?pce)가 금속판 위에 이미지를 정착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이것을 헬리오그래프(Helio-graph)라 하였다.

그 원리는 광선에 노출되면 굳어지는 아스팔트의 일종인 유대 비투멘(bitumen of judea)을 바른 백랍판 위에 만들어진 것으로, 빛에 노출된 비투멘은 굳어지고, 노출되지 않아 부드러운 비투멘은 용해되어 없어지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한편 1831년에 또 다른 프랑스인인 루이 다게르(L.J.M.Daguerre)가 옥화은판을 노출시킨 뒤 수은 증기에 쬐어 이루어지는 습식 사진의 기본원리를 발명하였다. 1837년에는 촬영, 현상, 정착의 프로세스를 완성하여 이미지를 영구적으로 고정시켰는데, 자신의 스튜디오(studio)의 한 구석을 촬영하여 ‘예술가의 스튜디오’라 제목을 붙이고, 이 과정을 다게레오타입(daguerreo-type)으로 불렀다.

같은 무렵 영국에서는 윌리엄 폭스 탈보트(W.H.Fox Talbot)가 니엡스나 다게르의 방식과는 달리 자연의 영상을 염화은을 통하여 종이의 섬유 위 레이스나 깃털을 밀착 현상했다. 이때 명암이 반대로 이루어지는 음화(negative·陰畵)가 이루어졌고 이것을 원판으로 하여 몇 장이고 양화(positive·陽畵)를 만드는 시도에 성공했다. 이러한 실험들을 거쳐 1840년 6월에 현대 사진의 근본이 되는 기술을 발표하게 된다. 감광유제가 입혀진 종이에 잔상이 형성될 정도로만 노출을 한 다음 화학적 현상과정을 거치는 기술이었다. 그는 이를 칼로타입(calo-type)이라 불렀다. 칼로타입은 여러 이미지들을 복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게레오타입과 달랐다. 그러나 이것은 다게레오타입이 이미 1839년 1월7일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에서 최초의 사진기술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이보다 늦은 1839년 1월25일 영국 왕립기구에서 발표되면서 최초의 사진발명으로 인정을 받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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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카메라 ‘결정판’ 코닥 DCS
1851년 3월에는 프레드릭 스코트 아처(Frederick Scott Archer)에 의해 콜로디온 습판 방식이 도입되었다. 다게레오타입의 장점인 선명도와 칼로타입의 장점인 복제성을 동시에 갖고 있으면서 감광성도 좋았던 이 방식은 건조시킨 방식(건식)이 도입되기 전인 1880년대 후반까지 널리 이용되었다.

1880년대 즈음에 새로운 젤라틴 유제가 개발되었고, 이를 이용해 롤(roll)필름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조지 이스트만(George Eastman)은 이러한 기술을 이용해 ‘이스트만 아메리카 필름’을 생산했다. 이때 롤필름을 통하여 새로운 종류의 카메라도 만들 수 있었다. 그는 1888년, 100장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필름이 들어있는 코닥(Kodak) 카메라를 내놓았다.

코닥은 “You push the button, we do the rest”(버튼만 누르세요. 나머지는 알아서 작동할 것입니다)라는 슬로건으로 사진과 카메라의 대중화를 이끌어냈다.

제임스 클럭 맥스웰이 1861년 만들어낸 최초의 컬러 사진
제임스 클럭 맥스웰이 1861년 만들어낸 최초의 컬러 사진

1861년에는 영국의 물리학자 제임스 클럭 맥스웰(James Clerk Maxwell)이 타탄(tartan) 리본의 색을 재현해낸 최초의 컬러사진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1928년에 코닥이 컬러 필름을 생산하면서 컬러사진의 대중화도 이루어졌다.

1969년에는 디지털 사진을 위한 전하결합소자(Charge-Coupled Device, CCD)가 AT&T 벨 연구소의 윌라드 보일과 조지 E. 스미스에 의해 발명되었다. 이어 1975년 코닥의 엔지니어인 스티븐 사순이 100×100 픽셀 CCD를 장착해 ‘필름이 필요 없는’ 최초의 디지털 카메라를 만들었다. 또 코닥은 1986년에 세계 최초의 140만 메가픽셀 이미지 센서를 발명하였으며, 1990년에는 전문 사진가를 겨냥하여 시장에서 구입이 가능한 디지털 카메라인 코닥 DCS(digital camera system)를 발매하였다.

이번 시각문화 3.0에서는 사진의 발전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사진의 진전은 단순히 기술적 확장만은 아니다. 그러한 발전의 근거에는 인류의 이미지에 대한 대단한 갈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갈망이 없었다면 그토록 눈부신 진전이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사진의 발명과 더불어 우리는 기존 시각이미지에 대하여 냉대하게 되었다. 이제 사물을 거의 똑같이 묘사하는 전문가, 장인들의 손재주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나아가 사진작가라는 새로운 예술가들이 나타났다. 사진작가들은 기존의 화가들이 담당한 일들을 이어받았음은 물론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시각이미지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불과 백여 년 만에 이루어진 시각문화 3.0 시대의 첫 번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언제나 새롭게 이루어지는 예술사조들은 만만치 않은 반발에 직면하게 되는데 사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진을 예술로 인정할 수 없다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이들은 디지털 사진의 등장에 분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제 사진은 고유의 시각예술 영역으로 확실하게 자리 잡았으며 디지털 사진의 가치에 대하여 시비 거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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