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문화 3.0시대⑧] 후기인상파 3인방 ‘고흐·세잔·고갱’ 그리고 입체파 피카소
[아시아엔=김인철 전주비전대 교수, 전 한국미술협회 이사] 인류의 시각에 있어서 인상주의는 시민혁명만큼이나 획기적이었다. 인상주의가 나타날 무렵 이들에 대한 반발과 무시는 심했다. 하지만 서서히 그들의 노력이 인정받아 가면서 보는 방법에서 보다 구체적이고 한층 이성적인 철학이 담기기 시작했다.
이들은 후기인상파(後期印象派, Post-impressionism)로 따로 규정된다. 후기인상파를 대표한 화가들로는 세잔(Paul Cezanne, 1839~1906),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고갱(Paul Gauguin, 1848~1903) 등을 들 수 있다.
대표적으로 꼽히는 세 화가의 삶은 마치 세간에 신화처럼 잘 알려져 있다. 일찍이 에밀 졸라(Emile Zola)는 <작품>(L’OEuvre)이라는 소설로 세잔을 묘사했고, <달과 6 펜스>(The Moon And Six Pence)를 통해 서머셋 모옴(Somerset Maugham)은 고갱의 삶을 세상에 알렸다. 어빙 스톤(Irving Stone)은 <삶의 욕망>으로 고흐의 일생을 썼을 정도였다. 하지만 세 사람이 시각이미지에 남긴 진정한 영향에 대해서는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들의 작품은 생각보다 훨씬 혁명적이며, 현대 추상미술이 나아갈 방향을 규정하게 되었다. 즉 어려운 시기에 무수히 많은 난관 속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 시각적 실험을 한 이들의 노력, 그리고 그 결과는 20세기와 더불어 만개하게 된다.
세잔의 시각은 사물의 모습을 원, 원기둥, 원뿔로 재조립하고 색채 역시 이에 맞게 원근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한편 고갱의 시각은 원시로의 회귀, 순수의 회복이었다. 그가 남긴 색면(色面)은 신앙적으로 고결함을 추구한, 그래서 평면에 가깝게 단순하고 원시적·원초적이었다. 고흐는 내면의 열정을 붓터치 하나하나로 표출시켰다. 마음속에 남아 있는 감정의 찌꺼기 마지막까지 세심하게 캔버스에 나타낸 것이다. 그리하여 세잔의 영향은 입체파(Cubism)로, 고갱의 시각은 야수파(Fauvism)로, 그리고 고흐의 열정은 표현주의(Expressionism)로 연결되었다.
20세기의 시작은 이들 유파의 등장과 함께였다. 이에 따라 우리는 피카소(P. Picasso), 브라크(G. Braque)라는 입체파 화가들을, 루오(G. Rouault), 마티스(H. Matisse)와 같은 야수파를, 뭉크(E. Munch)와 같은 북유럽 표현주의 화가들을 잘 알게 되었다. 이들의 등장은 이후 이루어지는 추상 세계의 전개를 보다 원활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리하여 형체의 해체와 화가 심상의 보편적이고 자유로운 표현을 위한 빗장은 모두 제거되었다. 이후 봇물처럼 여러 유형의 시각적 실험들이 만들어지면서 추상미술이 여기저기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먼저 러시아(소련)의 화가 말레비치(K. Malevich)는 기하학적 추상주의를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절대주의(Suprematism)이다. 그는 회화라는 모방적 집착을 벗어나기 위한 조형적 실험을 꾸준히 시도하여 1915년 6월, 단면으로 나타낸 하얀 바탕의 작품 위에 하나의 검은 사각형을 그린다. 그는 기하학적으로 그저 단순한 형상을 표현하는 것과는 달리, 이 사각형은 자율적인 실재를 가지고 있으며 역동적인 무게와 함께 율동감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말레비치는 그것을 ‘비객관적’이라 부르며, 순수한 색감들의 절대성에 대한 구조 즉 절대주의라는 정의를 내렸다. 그의 작품은 추상이라 해도 단순히 현실적 감각세계를 거부한 것이 아닌, 순수한 감성의 극점으로서의 추상 즉 주관주의적 추상이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그의 시도는 몬드리안(P. Mondrian)의 신조형주의(De Stijl, the Style)보다 앞서 이루어진 것이다.
거의 같은 시기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전위예술 운동의 하나로 미래주의(Futurism)가 있다. 미술뿐 아니라, 시, 음악, 연극, 문학 등 예술 전반에 걸쳐 이루어진 미래주의는 시인 마리네티(F. T. Marinetti)가 1909년 2월 20일자 파리의 일간지 <피가로>에 최초로 ‘미래주의 선언’을 발표한 것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들은 “화폭 위에 재현하고 싶은 것은 역동적 세계의 고정된 한 순간이 아니라, 세계의 역동성 그 자체이다”라면서, 과거의 모든 것을 없애고 빠른 속도와 다이내믹한 힘이 넘치는 기계문명의 표현을 주장했다. 미래주의는 새로운 시대의 미를 위한 보편적 힘으로서의 역동성(Dynamism)을 화면에 구현하려고 시도하였다. 즉 ‘공간과 시간 속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소리, 빛, 운동 등을 가시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동시성)을 시도한 것이다.
이들의 작업은 앞서 언급한 말레비치 등의 작가들에 적지 않은 자극이 되었고 다소 과격한 선동 기법과 우상파괴주의, 反전통의 정신은 20세기의 중요 현상 중 하나인 다다이즘(Dadaism)으로 연결되었다.
일련의 실험적 운동이 이어지면서 본격적인 추상이 제도권 사회에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추상표현주의(抽象表現主義, Abstract Expressionism)다. 추상표현주의라는 말은 일찍이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의 초기작품에 대해서 사용했던 말로, 미국의 평론가 바(Alfred Barr)가 1929년 미국에서 전시 중이던 칸딘스키의 작품을 언급했던 말이다.
러시아 출신으로 독일 바이마르의 미술학교 바우하우스(Bauhaus)에서 후진을 양성한 칸딘스키는 최초로 추상회화를 그린 화가다. 바는 칸딘스키의 작품에 대하여 형식적으로는 추상적이나 내용적으로는 표현주의적이라는 의미에서 추상표현주의라고 규정했다. 이후 1946년 <뉴요커>(The New Yorker)의 기자이자 평론가인 로버트 코츠(Robert Coates)가 이 용어를 미국의 젊은 작가들, 특히 폴락(Jackson Pollock)과 드 쿠닝(Willem De Kooning)의 작품에 사용함으로써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이 말이 부적절하다는 견해도 있어서 비평가 로젠버그(H. Rosenberg)는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이라 부르기도 했지만 추상표현주의는 현대 미술 초창기의 복합적인 여러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적절한 이름으로 보아 무방하다. 즉 추상표현주의 속에는 야수파, 표현주의, 미래주의, 다다이즘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들이 모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추상표현주의는 1951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미국 추상회화, 조각전’을 계기로 강력하고 주도적인 미술 운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