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 문화 3.0 시대 ①] 미술이라는 예술의 탄생
[아시아엔=김인철 전주비전대 교수] 산업혁명(産業革命)은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영국에서 시작된 기술의 혁신과 이로 인해 일어난 사회, 경제 등의 큰 변혁을 일컫는다. 산업혁명은 후에 전세계로 확산되어 세계를 크게 바꾸어 놓게 된다. 산업혁명이란 용어는 아놀드 토인비가 <영국 산업혁명 강의>(Lectures on the Industrial Revolution of the Eighteenth Century in England)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다.
19세기를 열면서 유럽문명의 중심은 영국으로 넘어간다. 영국에서는 다른 국가보다 일찍 여러 혁명(17세기 명예혁명)이 일어났고 봉건제가 해체되어 정치적인 성숙과 안정이 이루어지면서 유럽의 다른 지역과 달리 자유로운 농민층이 나타났다. 당시 영국에서는 이들 농민을 주축으로 하여 직물공업이 많이 발달하게 되고, 풍부한 지하자원(기계와 동력에 필요한 석탄, 철)과 제2차 인클로저운동의 결과로 많은 노동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식민지 지배 등을 통해 자본도 많이 확보하고 있는 상태였으며 18세기 들어서 영국 내외에서의 면직물의 수요가 급증하자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개량해 대량 생산이 시작되었다.
이를 산업 혁명의 출발점으로 본다. 이리하여 많은 기계들의 발명이 이어지는데 이제 기계는 생산을 지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산업혁명은 경제구조의 혁명적 변화는 물론 정치구조도 크게 바꾸어 놓는 결과를 가져왔다. 왕족과 귀족 지배체제가 무너지고,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선거법 개정을 요구해 관철시켰다. 공업화로 농촌인구의 대부분은 도시로 가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도시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무차별적 석탄 사용으로 도시 공기는 크게 나빠졌고, 비위생과 더불어 악취가 심하게 되었다. 노동자에 대한 인권유린도 산업혁명 때부터 대두됐다.
공장주들은 노동자들에게 반인권적인 장시간 노동을 강요했고, ‘어린이 노동’이라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대량생산으로 인한 제품생산 혁명은 수천년 이어 내려온 미술품 제작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기계에 의해 변하게 된 미술품 생산은 제조업자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져 결과물이 질적으로 조잡해졌다. 이익만 좇는 생산 방식 탓에 제품의 질은 자꾸만 저하되었다.
반면에 산업혁명을 이룩한 신흥 부르주아들의 눈은 전혀 달랐다. 그들에게 미술품은 갈수록 투자, 투기의 대상으로 변모되었다. 그러면서 미술 생산품에 대한 불만은 귀족 및 지식인 계층에게도 큰 불만을 사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존 러스킨과 윌리엄 모리스 등이 이러한 상황에 최초로 문제를 제기했고, 급기야 미술과 공예운동(Art & Crafts movement)이라는 디자인 혁신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흐름은 프랑스를 비롯한 대륙 여러 나라에서의 ‘신 미술(Art Nouveau, 아르누보)’로 이어지게 되었다. 아르누보의 미술 및 기술적 혁신은 오늘날 유럽인들의 세련된 취향의 기초를 이루게 되는데 매우 막강한 영향력으로 번져간 이 운동은 1차 세계대전이라는 복병을 맞아 갑자기 정지하게 되지만 이후 아르데코(Art Deco)기를 지나 현재에 이른다.
여기서 우리는 사진의 발명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831년 프랑스인 루이 자끄 다게르(1789~1851)는 옥화은판을 노출시킨 뒤 수은 증기에 쬠으로써 사진술의 기초원리를 발명하였다. 1837년에는 촬영, 현상, 정착의 프로세스를 완성하고 화상을 영구적으로 고정시켜 다게레오타입(daguerreotype)이라 불렀다. 같은 무렵 영국에서는 윌리엄 폭스 탤벗(1800~1877)가 다게르 방식과 별개로 자연의 영상을 종이의 섬유 중에서 염화은을 만들어 레이스, 깃털 등을 밀착 현상했다. 명암이 반대로 이루어져 음화(陰畵)로 만들고 이것을 원판으로 하여 몇 장이고 양화(陽畵)를 만들 수 있게 만들었다. 이러한 실험들을 거쳐 1840년 6월 탈보트는 현대 사진의 근본이 되는 기술을 발표하게 된다.
감광유제가 입혀진 종이를 이미지가 형성될 정도로만 노출을 한 다음 화학적 현상과정을 거치는 기술이었다.
1880년대 들어 새로운 젤라틴 유제가 개발되었고, 이를 이용해 롤필름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조지 이스트먼은 이러한 기술을 이용해 ‘이스트먼 아메리카 필름’을 생산해 냈다. 롤필름을 통하여 새로운 종류의 카메라를 만들 수 있었다. 조지 이스트만은 1888년, 100장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필름이 들어있는 코닥(Kodak) 카메라를 내놓았다. 이렇게 이루어진 사진술은 유럽 및 미국에 급격히 전파되었다. 이제 화가들을 동원하여 근사한 자신의 모습 또는 사물, 사건을 기록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화가들은 점차 절망에 빠지거나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만 했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시각이미지 2.0시대가 마무리 되면서 시각적 결과물의 개성을 요구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진의 발명으로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사물의 이미지를 재현할 필요도 없어졌다. 자의반 타의반 독립된 주체가 된 미술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작품에 책임을 져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히 예술적 정신을 담아야만 했다. 이들은 고민했고 인정받기 위하여 고생스런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인상주의부터 진정한 예술로 불릴 수 있는 시각물이 제작되어졌다.
반면에, 시각적 디자인의 시작도 이때부터 이루어졌다. 물론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이루어진 시각물들은 모두 디자인이었다. 그것들 모두 제작 의뢰자들이 있었고 이들의 의도대로 만들어져 어떤 역할을 한 목적물들이었다. 그러나 이게 19세기를 지나면서 작가 자신의 철학을 담는 시각예술로 정립되고 지금까지 있어왔던 기존의 시각적 결과물들은 영국에서 이루어지는 ‘미술과 공예운동’ 이후에 본격적인 시각 디자인이라는 어쩌면 산업혁명의 결과물로 새롭게 나타나게 된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동문 수학을 하다 요절한 평론가 박이소가 번역한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라는 책에 언급한 내용들을 소개한다.
이 책은 미국 RPI의 메리 앤 스타니즈웨스키의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Believing is Seeing)를 번역한 것이다. 그녀는 이 책을 통해서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 오스트리아 빌렌도르프에서 발견된 비너스 조각상, 베르사이유 궁전, 기자의 피라미드, 그리스 나이키 조각상, 와또의 바로크 그림 ‘시테라 섬으로의 순례’, 인도의 시바 조각상, 림부르그 형제의 ‘드 베리 공작의 귀한 시절 그림’, 아프리카 가봉 토착민의 제식 가면, 중국에서의 황제 봉헌도 그리고 다빈치의 ‘모나리자’ 등을 미술이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미술인가? 그녀가 미술로 규정한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마르셀 듀샹의 ‘L.H.O.O.Q’,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자들’, 듀샹의 ‘샘’, 피에트 몬드리안의 ‘회화’, 존 하트필드의 ‘만세, 버터가 모두 사라졌군!’, 블라디미르 타틀린의 ‘제3세계 인터내셔널 기념비 모형’, 로버트 스미스슨의 ‘나선형 둑’, 아드리안 파이퍼의 ‘구석에 몰려’, 신디 셔먼의 ‘무제필름 스틸’ 시리즈, 에바 헤세의 ‘우연’, 잭슨 폴락의 ‘넘버 회화’ 시리즈, 들라크르와의 ‘사다나팔루스 왕의 죽음’, 조셉 코수스의 ‘제목’, 앤디 워홀의 ‘네 명의 모나리자’ 등이다.
이들의 차이점 구분이 바로 시각 문화 3.0의 시작이며, 시각문화에 있어서 진정한 예술이 시작됐음을 알려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