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문화 3.0시대⑨] 칸딘스키 ‘추상표현주의’와 프랑스의 ‘앵포르멜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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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렘 데 쿠닝(자신의 스튜디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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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마더웰의 스페인공화국에 바치는 비가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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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로스코의 No. 1(Royal Red and Blue,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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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스의 무제(194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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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중인 장 ?뒤 뷔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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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프란시스의 마코 시리즈?가운데 한 작품(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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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치오 폰타나의 Concetto spaziale(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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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친스키의 타리데 부인(1989)?

[아시아엔=김인철 <아시아엔> 미술전문기자, 전주비전대 교수] 1929년 미국의 평론가 알프레드 바(Alfred Barr)는 당시 미국에서 전시 중이던 칸딘스키(W, Kandinsky)의 작품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추상표현주의’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다. 이후 1946년 <뉴요커>(The New Yorker)의 기자이자 평론가인 로버트 코츠(Robert Coates)가 이 용어를 미국의 젊은 작가들, 특히 잭슨 폴락(Jackson Pollock)과 드 쿠닝(Willem De Kooning)의 작품에 사용함으로써 일반화되었다.

구체적으로, 세계대전을 피하여 미국으로 건너온 유럽의 전위적(Avant-Garde) 작가들은 이후 미국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뒤샹(Marcel Duchamp), 몬드리안(Piet Mondrian), 가보(Naum Gabo), 샤갈(Marc Chagall), 에른스트(Max Ernst), 탕기(Yves Tangui), 마타(Roberto Matta), 마송(Andr? Masson), 브르통(Andr? Breton) 등이 미국에 남거나 머물며 작업을 했다.

이들의 영향으로 미국 회화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작가들이 속속 나타났다. 이미 언급한 폴락, 드 쿠닝 외에 로버트 마더웰(Robert Motherwell), 마크 로스코(Mark Rothko) 등이 그들이다.

이렇게 이루어진 추상표현주의 초기의 큰 특징은 유럽 초현실주의에서의 방법론인 ‘자동기술’(automatism)의 또다른 모습이었다. 물질적으로 대단한 풍요를 이루던 과정에 맞이한 1차세계대전에서의 상실감으로 다다(Dada)라는 전면부정의 양식을 불렀다면 이에 대한 극복이 바로 초현실주의였다. 이리하여 폴락은 전면균질적(全面均質的)인 공간 구성과 함께 ‘물감을 흘리는 기법’(dripping)으로 시각적 이미지를 만들면서 그 와중에 행위 자체에 중점을 둔 액션페인팅(action painting)까지 보여주었다.

회화에 있어서 이런 작업은 추상의 태동기에 시도한 소극적 자세를 엄청나게 뛰어넘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우리는 이미 시각 이미지의 목적성에 주목해왔고 그것이 바로 수천년 간 인류가 추구하며 만들어온 ‘결과물에 대한 만족’임을 잘 알고 있다. 그림에서 과정은 중요하지 않고 얼마나 잘 그려 완성했느냐가 중요한 문제였다. 매우 하찮은 그림을 그려도 목적을 완수하면 그것으로 대만족이었고 그게 상업적인 것인지 순수 예술을 위한 것인지는 그 다음의 문제였다. 그런데 이것이 ‘과정중심’으로 바뀐 것이다. 이는 시각 이미지 제작의 대변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후 추상표현주의는 1951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미국 추상회화, 조각전’을 계기로 강력하고 주도적인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나아가 1950년대 이후 이 운동은 세계 각국으로 파급될 정도로 국제적인 양식이 되었다. 이제 미국은 더 이상 시각 이미지의 변방국가가 아니었다. 추상표현주의를 표방하면서 많은 작가들이 미국을 중심으로 활약했는데 이들 중 라인하트(Ad Reinhard), 뉴만(Barnet Newman), 로스코, 마더웰 등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이후 이루어진 ‘색면파 회화’(Colorfield Painting)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에서 추상표현주의가 자리잡을 무렵 유럽에서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앵포르멜 미술’(Art Informel)이 나타났다.

앵포르멜은 원래 부정형(不定形, Informal) 또는 비정형(非定形, Non-formal)의 뜻이다. 앵포르멜 미술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새롭게 이루어진 아카데미적 추상, 특히 기하학적 추상에 대하여 반발하여 일어난 것이다,

전위적 미술가들은 이른바 아카데미적으로, 또는 정형화되는 양식에 대하여 본능적으로 강하게 거부했다. 이들은 시각 이미지 제작에 있어서 계획적으로 의도된 것에 반대하면서 주관적이며 자유분방한 표현을 추구했다.

이에 따라 앵포르멜은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에 버금가는 동시대 유럽 미술을 지칭하면서 뜨거운 추상 또는 부정형의 추상 전체를 양식적으로 대표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즉 기하학적이며 지극히 도형적으로 차가운 추상에 대하여 강력하게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파리의 드루엥 화랑에서 열린 포트리에(Jean Fautrier), 볼스(Wols, Alfred Otto Wolfgang Schulze), 장 뒤뷔페(Jean Dubuffet) 등의 전시회로 앵포르멜 운동은 그 시작을 알렸다. 1945년 발표된 포트리에의 ‘인질’(Otages)전, 1946년 뒤뷔페의 ‘오트 빠트’(Haute P?tes)전, 그리고 1947년 볼스의 두번째 개인전이 그것이다. 이들은 가혹한 전쟁 상황 속에서 자신의 체험을 기반으로 억압된 인간의 극한적인 정신세계 등을 다루었다. 구상과 추상을 불문하고 기존의 회화 개념 및 소재의 틀을 깨고 삶의 실존적인 모습을 표출하고자 했으나 소수의 문학가 및 화가에게 인정받았을 뿐 큰 주목은 끌지 못했다.

앵포르멜의 이념이 구체화된 것은 1951년 니나 도세(Nina Dausset) 갤러리에서 열린 ‘대립된 격정’(V?h?mences confront?es)전으로 볼 수 있다. 전시회에는 프랑스 출신의 마티유(Georges Mathieu)와 브리앙(Camille Bryen), 독일의 볼스와 아르퉁(Hans Hartung), 캐나다의 리오펠(Jean-Paul Riopelle), 미국의 폴락과 드 쿠닝 등이 참가했다.

앵포르멜이란 명칭은 1952년 6월 스튜디오 파케티(Faccheti)에서 열린 ‘앵포르멜이 의미하는 것’(Significant de l’informel) 전시회에서 정식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전시회의 제목은 구조주의 언어학자 소쉬르(Saussure)의 개념에서 따온 것으로, 앵포르멜을 주도한 평론가 미셸 따삐에(Michel Tapi?)는 “‘의미하는 것’과 ‘의미하지 않는 것’을 같은 위치에 놓고 비정형 속에서 의미를 찾고자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아르 오트르>(Un Art Autre, 1952)라는 소책자에서 “본래 앵포르멜의 근원적인 생명의 징후는 구상, 비구상을 부정하고 ‘생생한’ 형태(form)에 정착하는 것”이라며 “입체주의와 기하학적 추상은 붕괴된 고전주의의 ‘마지막 절규’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초현실주의도 낭만주의의 문학적 변용으로 보아 역시 부정한다”고 밝히면서, 가치 전도를 위해 反휴머니즘의 극한까지 밀고 나갔던 니체와 다다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산으로 규정했다. 미셸 따삐에는 이러한 일체의 미학적 권위 파괴 위에 위상기하학, 집합론, 양자역학, 비교적(秘敎的) 기독교와 심지어 노장사상(老莊思想) 등을 끌어들여 앵포르멜의 진로를 제시하였다.

따삐에는 앵포르멜 미술이 표현의 제스처보다는 마티에르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하였으나 본래 유파(流派)나 이즘(ism)을 목표로 하지 않았던 만큼 작가들의 양식은 다양했다.

앙리 미쇼(Henri Michaux), 샘 프란시스(Sam Francis), 삐에르 술라주(Pierre Soulages), 마크 토비(Mark Tobey), 루치오 폰타나(Lucio Fontana), 뽈 부리(Pol Bury), 알레친스키(Pierre Alechinsky), 타피(Antoni Tapies), 마크 로스코 등 다채로운 구성원들을 끌어들여 전쟁 이후 이루어진 전위미술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흐름을 완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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