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미술 수메르③] 메소포타미아인은 왜 원통형 도장을 만들었을까?

원통형 인장

[아시아엔=김인철 김인철 전주비전대 교수, 시각문화 저널리스트, 전 한국미술협회 이사, SFU(캐나다) 연구교수]?원통형 인장이 수메르에서 제작된 일은 획기적이면서도 흥미로운 일이다. 사실 원통형 인장은 현재 동아시아에서 사용하고 있는 도장과 거의 유사한 모습이면서 같은 기능을 했기 때문이다.

원통형 인장(cylinder seals)

월간미술에서 펴낸 미술용어 사전에서는 이를 장식품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하구에 자리잡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질 좋은 흙이 가득 찬 곳이다. 이곳을 최초로 차지한(최초였다는 추정은 그들이 문자를 만들어 기록과 유물을 남겼기 때문) 수메르인들은 지역적 유리함을 살려 거대한 농경사회를 이루었다.

거대 농업경제는 필연적으로 지주와 노예라는 계급을 만들었고 이런 특징은 바로 ‘정착민 문명’을 이루는 근거가 되었다. 즉 정착민 문명이라는 거대 경제 시스템을 이루기 위해서는 노동을 담당하는 노예, 즉 농노를 필요로 하였다. 이렇게 성립된 농업은 거대 규모를 이루어, 소유권을 비롯한 여러 기록을 만들어야만 했다. 이를 위하여 원통형 인장은 무척 중요한 구실을 했다. 즉 소유권이나 지배계급의 정체성 등을 나타내는 용도로 쓰였기 때문이다.

유사한 기능을 가진 ‘도장’이 현재까지도 동아시아에서 중요하게 사용되는 점을 생각할 때 그들이 사용한 도장 역시 귀중한 물건임이 당연하다. 그런데 ‘인장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서구인들에게는 단순히 장신구로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수메르인들의 도장은 제작과 사용방법에서 동양의 도장과 약간 차이가 있다. 원통형의 모습은 유사했지만 동양의 인장이 원통 아래 부분에만 글자를 새겨 사용했다면 수메르에서는 아래는 물론 옆 부분에도 조각을 만들었다. 동양의 도장이 아래 부분에 인주를 묻혀 종이에 나타낸 반면, 수메르인들은 아래와 측면을 종이가 아닌 점토판에 찍고 옆으로 굴려서 사용했다.

우르의 지구라트

우르의 지구라트(Ziggurat of Ur)

‘거대 지구라트’(Great Ziggurat)로도 불린 우르의 지구라트는 고대종교에서 영적인 모임을 위하여, 아울러 지역의 행정 중심까지도 이루어지게끔 이루어진 대규모 사원을 말한다.

우르의 지구라트는 新 수메르기에 이루어진 것인데 그 축조 모습으로 보아 지구라트라는 건축물이 이전부터 있어왔음을 알 수 있다. 지구라트라는 공간건축을 만들면서 고대 중동에서 인간의 死後와 관련된 종교가 정립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인간의 내세를 규정하면서 죽으면 ‘영’(Ghost)을 이룬 후 하늘 즉 천국으로 올라간다는 종교를 만들어냈다. 이를 토대로 이 지역에서 비롯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시작이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우르는 지금의 이라크 디카(Dhi Qar) 지역 나시리야(Nasiriyah) 인근이다. 이 지구라트는 초기 청동기에 건축되었으나, 훼손돼 방치상태로 있다 B.C. 6세기 신바빌로니아의 나보니두스(Nabonidus)왕에 의하여 재건됐다.

그러다가 1930년대 레오나드 울리 경(Sir Leonard Woolley)에 의하여 발견된 이후 한동안 방치되었다가 1980년대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집권기에 중앙의 기념계단과 누각이 재건축되었다. 우르의 지구라트와 더불어 우르 남무 궁전(Palace of Ur-Nammu)과 왕궁 마우솔레아(Royal Mausolea) 등이 매우 잘 보존된 유물들이다.

우르-남무왕(King Ur-Nammu)에 의하여 만들어져 헌정된 지구라트는 대략 서기 전 21세기, 즉 우르 제3왕조기로 볼 수 있다. 규모는 30m 높이에 넓이 45m, 길이 64m를 유지한, 대단한 크기의 계단식 피라미드다. 게다가 건축 당시의 높이를 아직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지구라트의 건축은 거의 같은 시기(B.C. 21세기) 슐기왕(King Shulgi) 시기에 이르러, 인근 도시국가들과의 경쟁을 물리치며 메소포타미아의 명백한 지배자로 자리매김하면서 끝을 맺는다. 지구라트는 이 지역에 풍부한 양질의 흙으로 흙벽돌을 만든 후 그 틈새에 같은 진흙을 메워 제작한 거대 벽돌건축물이다.

공예미술

인류 최초의 문자를 만들면서 교역, 종교, 계급 등의 제도들 역시 이를 처음 만든 사람들은 수메르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기원에 대한 의문은 여전한다. 그들이 북쪽 카스피해 부근에서 남하한 부족의 하나라는 설이 있다. 그곳은 스키타이(Scythia)의 본거지와 겹치는 지역이다. 수메르인이 남겨 놓은 금속유물(Metal smith art)을 통하여 스키타이와의 관련성을 어느 정도 추정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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