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문화 3.0시대⑪] 앤디 워홀과 클래스 올덴버그가 돋보이는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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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엔=김인철 <아시아엔> 디자인 고문, 전주비전대 교수] 영국에서 단초를 제공한 후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발전돼 세계로 퍼진 팝 아트(Pop art)는 산업사회의 번영을 미술 속에 적극적으로 수용한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엿보였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난 후 비평자들로부터 “다다이즘(Dadaism)에서 시작한 허무하기만 한, 대안 제시도 아니었던 반미술 정신이 그저 단순히 소비문화에 굴복한 것”이라는 혹평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팝 아티스트들은 이러한 비판에 아랑곳 하지 않고 매우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어 팝아트의 양식을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 어쩌면 이제까지 있던 것들을 이상하게 바꾸어 새로운 객체를 만들어냈다고도 볼 수 있다.

대표적 작가인 클래스 올덴버그(Claes Oldenburg)는 작품의 크기, 재료, 질감에 여러 변형을 가하였다. 그는 1961년 음식물 모형을 파는 상점을 열었으며 이후 일상용품을 확대, 변형시킨 작품(타자기, 욕실용구, 선풍기, 석고, 헝겊으로 만든 대형 햄버거, 아이스크림, 담배꽁초 등)들을 제작하였다. 이 작품들은 이례적으로 왜곡되어 크게 제작되었는데 이렇게 이루어진 눈에 익숙한 객체(object)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상대적으로 무가치해진 물질들의 속성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깊은 해학과 풍자와 함께 역사적으로 처음 맞이하는 대량 소비문화의 시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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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이러한 표현은 텔레비전으로 대표되는 매스 미디어, 상품광고, 쇼윈도우, 고속도로 주변의 빌보드와 거리의 교통표지판 등 일상적인 것들에서 비롯하여 코카콜라, 만화 속의 주인공 등 매력적이면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들을 미술 속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이라는 이분법과 위계적 구조들에 대하여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렇게 이루어진 팝 이미지들은 광고, 상표, 만화, 영화 등의 대중적 소비문화 이미지들을 한 번 더 되돌아보기 위한 시각적인 재현으로의 해석을 꾀하면서, 현대 산업사회와 물질사회를 사는 인간의 감수성을 새롭게 의식화한 것일 수 있었다.

한편, 팝 아트 작가들은 대개 손으로 하는 작업을 기피하면서 나름대로의 소재를 선택하고 일부는 실크스크린(silk screen)으로 작업한 뒤 적당한 색깔로 찍어내는 작업 등을 반복했다. 이러한 제작과정을 통한 작품은 누구의 작품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비개성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앤디 워홀(Andy Warhol)은 누구나 시도할 수 있는 기법으로 주위에 흔한 이미지들을 대중화시켰으면서도 그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복제와 기법의 보편화를 이룸으로써 시각 이미지를 개인적인 것에서 대중적인 것으로 만들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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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은 주위에 흔한 상품이나 특정 스타의 얼굴 등을 똑같은 이미지로 만든 다음 도구의 힘을 빌어 반복하여 배열하는 작업을 했다. 따라서 특정한 상품이나 이미지는 어떤 개인의 독자적 절대적인 영역이 아닌 복제 가능한 보편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모든 작업은 주로 실크스크린 판화기법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는 당시 주위에 흔했던 광고 기법의 속성을 차용한 것이었는데 결과적으로 대중문화의 성격에 걸 맞는 예술 형태를 보여주는 것이 되었다.

앤디 워홀은 대중적 이미지뿐 아니라 특정인의 이미지들을 여러 가지 전형적이며 정형적 이미지들로 만들었다. 예를 들어 머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와 같은 유명인들, 꽃, 코카콜라병 또는 전기의자, 자동차 충돌 장면, 폭풍의 현장 등을 캔버스 위에 반복적으로 묘사하면서 스스로 해석한 임의적인 색채를 그 위에 첨가하여 미묘한 효과를 보여주는 작품을 만들었다.

팝스타일 시각 이미지 작가들은 매스미디어에서의 통속적인 주제였던 사랑과 성(性)을 통하여 산업 사회에서 실종되어 가고 있는 인간존재의 참 모습을 찾고자 하는 방법도 추구했다.

그런데 그 방법은 도구화된 성과 상업화된 성 표현으로 진정한 에로티시즘이라는 의미의 환기였다. 어쩌면 역설적이었는데 이러한 방법은 의미 전도의 한 유형을 보여주는 실례가 되고 있다. 즉 인간성의 복원으로 성을 내세웠는데 그게 시각적이며 말초적인 자극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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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 아트가 에로티시즘과 관련이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대량 소비, 즉 소비 사회에서 상업적 전달 언어로서 자극적 도구로 작용하면서 광고와 소비를 부추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체의 매력과 더불어 젊음을 개방하고, 노출된 윤곽선으로 에로티시즘의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표현하여 독특한 관능세계를 보여주었다는 식으로 변명의 여지를 남겼다.

아무튼 팝아트에서의 에로티시즘은 철저히 19세기말과 20세기 초 유럽에서 크게 유행한 아르누보(Art Nouveau, New Art)의 방법론을 그대로 따랐다 해도 무방하다. 당시 유럽은 전대미문의 풍요 속에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던 시기였다. 심지어 향정신성 약물에 의한 싸이키델릭(Psychedelic) 표현의 정점에 있었고 이런 식의 표현은

당시 최고 인기 매체였던 광고 포스터 속에 만개하였다.

1차 세계대전으로 그러한 흐름은 소멸했지만 2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함께 찾아온 미국 중심의 서구 사회의 풍요는 다시 한 번 19세기말식 자유로운 표현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팝 아트는 물질문명 사회에서 살게 된 인류에게 새로운 시각 이미지 방법론으로 채용되어 큰 거부감 없이 새로운 모습을 거듭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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