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 Jang의 톡톡튀는 호주이야기⑥] ‘짝사랑 모국’ 영국 벗어나 미국과 동맹 맺은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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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하이드파크 안에 있는 ANZACS 갤러리 전경

[아시아엔=장영필 <아시아엔> 호주 특파원] 숫자 1은 충분히 변형가능하다. ‘1’의 윗부분에서 아래로 비스듬하게 선을 하나 그으면 ‘8’자를 만들 수 있다. 어린 시절, 부모님한테 혼날까봐 학교에서 받아온 성적표를 많이 고쳐본 이들은 알 것이다. 2, 3 또한 충분히 가능하다. 4, 5, 6, 7, 9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8’이라는 숫자는 도무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이래서 팔자(八字)는 못 고친다고?

1760년대 이후, 이런 저런 이유로 모국인 영국을 떠나 먼 타국땅에서 ‘또 하나의 영국’을 만들어 낸 호주와 호주인들. 비록 품행이 방정치 못하다는 이유로 모국에서 방출당했지만 그들 마음속은 늘 ‘미워도 다시 한번’ 심정이었다. 그리고 ‘썩어도 준치’라는 말과 같이 호주인들은 자신들이 ‘해가지지 않은 나라, 대영제국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1942년 2차대전 당시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1874~1965)의 “형제관계를 끝내자”는 냉정한 말 한마디가 있기 전까지 호주인들이 영국을 두고 “모국”(Mother Country)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반면, 모국 영국의 마음은 마치 “안 보면 멀어진다”(Out of Sight, Out of Mind)는 말처럼 그저 “바다 건너 우리 이복동생 하나 있거니”하는 심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1차대전이 끝난 직후 영국이나 호주나 다같이 먹고 살기 힘든 경제공황기(Depression)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힘든 전쟁통이어도 돈 버는 이들 또한 생기는 법. 1차대전 종전 이후, 일찌기 산업혁명을 거친 영국을 비롯하여 독일, 이태리, 그리고 운좋게(?) 항해술이 발달한 서양 탐험인들에게 일찍 발견된 아시아의 일본은 재빠르게 군사대국으로의 꿈을 펼치고 있었다. 이런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몇나라의 군사대국화를 염려한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비무장평화노선을 주창하는 나라들은, 1920년 1월 파리평화회의의 결과로 오늘날 국제연합(UN, United Nations)의 전신인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을 결성한다.

원래 조금 가진 것들이 겸손치 못하고 건방 떠는 법이라 했던가? 일찍 근대화를 거친 독일이 제1차대전에서 대형사고를 친 이후 유럽 나라들은 독일에게 막대한 전쟁보상금과 반성을 요구한다. 이는 자신들이 유럽사회의 정통세력이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게르만인들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만든다. 이 틈을 노린, 훗날 인류사에서 게르만인들의 자존심을 영원히 지우게 한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한다. 그리고 독일은 1930년 국제연맹을 탈퇴한다. 그러자 연이어, 이탈리아도 탈퇴하고 이들 편에 일본이 가세한다. 이제 유럽뿐만 아니라 아시아에도 전쟁의 기운이 돌기 시작한다.

1939년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한데 이어 폴란드를 노리자 영국과 프랑스는 같은 해 9월 3일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유럽에서 2차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같은 날, 바다 건너에서 구경만 하던 호주 수상 로버트 멘지 또한 덩달아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마치 “우리는 죽으나 사나 한 뱃속에서 태어난 형제”라는 듯 말이다.

유럽 전세가 영국에게 급박하게 돌아가자 영국은 1차대전때와 마찬가지로 호주에게 외친다. “우리가 남이가!”

한 동안 안 보이던 이복형제라 해도 핏줄은 핏줄인 법. 모처럼 바다 건너 모국에서 날라온 간절한 요청에 호주는 경제공황기 없는 살림에도, 급하게 약 2만명의 자원민병대(Second Australian Imperial Force, 2nd AIF)를 꾸려 영국정부가 요청한 대로 북아프리카 전선으로 투입시킨다.

호주군과 영국군이 유럽에서 독일과 치열하게 공방전을 펼치는 동안, 일본은 아시아에서 ‘대동아공영권’의 허상을 실현하기 위해 미국령 하와이에 있는 진주만을 상대로 가볍게 ‘잽’을 날린다. 그리고 전 아시아권을 상대로 전면전을 펼친다. 태평양 전쟁의 시작이다.

아시아에서도 전면전이 벌어지자, 당시 영국령이던 싱가폴·말레시아·필리핀을 상대로 한 일본의 공격을 염려한 처칠은 1941년 12월 미국 워싱턴에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와 아카디아 회담을 한다. 이 회담에서 호주역사에 길이 남는 치욕의 순간이 만들어진다. 즉 처칠과 루즈벨트는 ‘독일 먼저’(German First)라는 원칙에 합의한다. 그리고 부득이 한 경우 호주는 포기하기로 한다. 그리고는 처칠은 이같은 사실을 호주 수상 커튼에게 감춘다.

가진 것 없는 사람이 눈치는 더 빠른 법이다. 1942년 신년메시지를 통해, 커튼 수상은 호주 일간지 <멜버른 헤럴드>에 “호주의 전략적 전환을 위해 새로운 군사적 파트너가 생겼다”고 천명한다.

“I make it quite clear that Australian looks to America, free of any pangs as to our traditional links or kinship with the United Kingdom.”(호주는 이제 영국과의 혈연이나 전통적 관계로 가졌던 감정을 떠나 이제는 미국을 바라다보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려 한다)

동시에 처칠의 심사를 간파한 호주 수상 커튼은 처칠에게 “싱가포르만큼은 꼭 지켜달라”고 요구한다. 그도 그럴 것이 지정학상 싱가포르가 함락된다는 것은 일본군이 호주에 상륙하는 길을 차지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942년 1월 싱가포르가 일본군에게 함락된다. 이는 영국 전사에서 가장 큰 패전 가운데 하나로 기록된다. 불과 두달 뒤인 3월 초 말레이 역시 일본 손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자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당시 미국령 필리핀에 있던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에게 태평양사령부를 필리핀에서 호주로 옮기라고 긴급 명령을 내린다. 이에 전쟁의 천재라고 불리던 맥아더는 작은 고속정에 자신의 가족들만 태운 채 필리핀을 떠나 호주 북쪽 다윈(Darwin)에 당도한다.

맥아더 도착 후 서너 시간 지나 미국의 통보로 이 사실을 알게 된 커튼 수상은 맥아더와 대화 도중 1941년 12월 처칠과 루즈벨트 대통령 간의 ‘아카디아회담’에서 처칠이 자신을 속인 것을 알게 된다. 아카디아회담에서 처칠과 루즈벨트는 “태평양 전선에서 버마-인디아를 제외하고, 호주를 포함한 나머지 국가는 미국의 책임 하에 전쟁을 치르자”고 합의했던 것이다. 그때 이미 호주의 전시작전권은 미국의 태평양사령관 맥아더에게 넘겨진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호주 정계는 그야말로 공황상태에 빠졌다.

처칠에게 강한 배신감을 느낀 커튼 수상은 ‘이판사판’ 심정으로 1942년 3월 20일 “우리는 미친 듯이 싸우고 있다”(We are fighting mad)는 제목으로 미국 국민을 향한 라디오 연설을 한다.

“Australia is the last bastion between the west of coast of America and the Japanese. If Australia goes, the Americans are wide open.”(호주는 미국의 서부 해안과 일본 사이에 걸쳐있는 마지막 전략적 요충지다. 호주가 무너지면 미국은 그대로 뚫리게 된다)

그러자 미국 태평양사령관 맥아더는 1942년 3월 26일, 호주 수도 캔베라 국회 의사당 연설을 통해 강한 메시지를 남긴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 죽는다!”(We shall win, or we shall die)

호주 북쪽 태평양전선에서 일본의 공세가 강화되자, 호주정부는 결국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과 함께 독일의 롬멜 장군이 이끄는 전차군단과 싸우던 호주군을 본국으로 재투입시킨다. 1942년 4월, 하와이에서 2400km 떨어진 미드웨이군도(Midway Isalnds)에서 일본해군은 미군에게 참패를 당해 해군력 대부분을 잃게 된다. 이에 일본은 넓게 펼쳐져 있는 일본군의 새로운 보급선을 찾기 위해 호주로 눈을 돌리게 된다. 1942년 5월 일본 잠수정들이 호주 북쪽 다윈에 이어 시드니항구를 공격한다. 그 중 일부는 호주 해군이 설치한 ‘잠수함잡이용 바다그물’에 걸려 포획당한다.

그물망사건이 대대적으로 호주신문에 보도되면서 호주 사회는 실제 전쟁상황으로 돌입하였다. 그리고 호주 방어에 대한 대대적인 국민적 일체감이 형성된다. 그리고 이때부터 호주사회는 모국 영국에 대한 감정들이 결국 짝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새 파트너 미국을 향한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 결과 2차대전을 통하여 호주는 점차 국제사회에서 약화되는 영국의 영향력을 인정함과 동시에 호주는 지정학적으로 또 다른 동맹국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결국 냉혹한 국제정치 역학구도에서 공짜는 없는 법이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은 한국전쟁과 같은 새로운 전쟁에 참전할 때마다 호주에게 외친다. “우리가 남이가!”

남북한을 합친 한반도의 70배 달하는 넓은 대륙, 인구는 남한의 절반도 안 되는 호주. 1901년 모국 영국으로부터 이론상(?) 독립은 헀으나 자주국방의 길은 아직 먼 호주였다. 2차대전 이후 새로운 파트너가 요구할 때마다 불려나가야 하는 처지에 있다. 결국 진정한 독립은 ‘인구수’에 달려있음을 호주는 근·현대사를 통해 알게 된다. 호주는 1970년대 인구가 하도 적어 군사적 중립국선언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장영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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