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필의 톡톡튀는 호주이야기⑦] 호주를 지탱하는 이 한단어 ‘메이트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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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주의 여성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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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를 처음으로 탐험한 영국의 해군, 캡틴 쿡(Captain C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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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시내 하이드파크 안에 있는 앤작갤러리(ANZAC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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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대전 당시 호주가 참전한 갈리폴리전투에서 호주군과 맞써 싸웠던

터키군의 케말 파샤 장군의 기념비 (앤작 갤러리 내 위치)

[아시아엔=Phil Jang <아시아엔> 호주 특파원] 스승의 그림자조차 밟지 않는 것을 예의로 여기는 한국사회에서, 주변 시선을 의식 않고 마구 행동하면 어른들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주 고약한 놈일세!”

여기서 말하는 “놈”을 영어로 표현하면, 놈(Norms)이다. 이것만 봐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사회를 운영하는 보편적 규칙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필자의 근거 없는 이론에 너무 빠지지 말기 바란다. 그저 그렇다는 것이다. Norms의 사전적 의미는 ‘규범적 태도’라는 뜻이다.)

사회를 움직이는 정신적이면서 규범적 태도는 무엇인가? 탈코드 파슨스(Talcott Parson, 1902~1979)라는 미국의 사회학자가 정의한 ‘사회적 규범’(Social Norms)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 간의 상호작용때 서로 지켜야 하는 규범적 태도를 의미한다. 즉 마을에 사람들이 모여 공동사회가 형성되면, 사회가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운영되기 위한 구성원간의 공동규약이 필요하다.

전통적으로 수백년 오랜 역사를 가진 유럽사회 특히 영국사회 구성원들로부터 시작한 호주사회 초창기 모습은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대로, 일부 영국귀족들과 그 휘하 장교들, 그리고 ‘Convicts’라고 불리는 수형자들로 구성된 계급사회였다. 이들이 호주에서 형기를 마친 후, 호주사회의 구성원이 되면서 점차 사회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그리고 1850년대 중반경부터 시작한 호주의 골드러시(Gold Rush)는 전 세계의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민자들을 유입시키는 계기가 된다.

1770년대 중반경부터 유입된 영국계, 아이리시(Irish), 스코틀랜드인들을 비롯하여, 1850년대부터 호주사회는 독일·프랑스·이태리·스칸디나비아 등의 각종 유럽인, 그리고 중국계·미국계 이민자로 구성된 다민족사회였다. 물론 양적인 인구분포 형태로 보면, 호주사회 운영을 담당하는 주축 세력은 예나 지금이나 영국인이다. 점차 사회가 다양한 양태를 보이자, 당시 호주정부 관리들조차 사회통제가 힘든 시절이었다.

게다가 1850년대부터 부시(bush, 호주의 야생지) 지역에서 광산개발을 통해 한몫 잡기 위한 광산 노동자간의 온갖 험한 일들이 자주 발생한다. 마치 미국 서부개척시대, 총 한자루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헀던 무법지대와도 같았던 셈이다. 그러자 기사도정신을 만들어 낸 영국의 후손답게 부시(bush)에서 원초적인 모습으로 살던 일명 스웨기(Swaggie)라고 불리던 날것 그대로의 모습이던 호주 남자들끼리 신사협정을 만들어 낸다.

예를 들어 △남의 물건에 손대지 않기 △이웃집 여자는 건드리지 않기 △광산주와의 임금협상시 공동대처하기 등과 같은 자치적인 공동규약을 만든다. 일종의 커뮤니티의 공동선과 이익을 위한 사회자치적 규범(Social Norms)이다. 호주에서는 이를 두고 메이트십(mateship)의 시작이라고 본다.

호주의 역사학자인 조이스 딕슨(Miriam Joyce Dixson, 1930~ )은 그녀의 저서 <The Real Matilda>에서, “호주는 국제적으로 강한 민주주의 전통을 갖고 시작하였으며, 그 결과 조직적인 노동운동을 낳았다. 그리고 근현대에 와서 호주의 강한 노동운동과 민주주의를 향한 다양한 의견들의 결합체가 바로 메이트십인 것이다”라고 말했다.

문화 혹은 사회 배경으로 보자면 1800년대 자신이 태어난 조국을 떠난 이들의 처지는 대부분 가난했다. 그런 이들이 새로 터 잡고 살아야 했던 호주 초창기의 사회여건 또한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주의 메이트십 사상이 빠르게 정착된 데에는 유럽대륙과 떨어진 호주의 지리적 여건 때문이기도 하였다. 즉 급작스럽게 커진 노동시장에 비해 외부공급을 통한 노동력 확보가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세계 1차대전 직후 미국의 경제대공황과 마찬가지로 호주 또한 경제공황시기(Depressions, 1920~1930)를 겪었다. 특이한 점은 이 시기에 숱한 노동분쟁을 겪었던 타국과 달리 호주에서는 비교적 노동쟁의 사태가 적었다. 그 이유는 도시에서의 삶이 팍팍해지자 많은 도시노동자들이 호주의 야생 숲속으로 들어가 자급자족 생활을 꾸려나갔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이 가능했던 이유가, 호주라는 나라가 워낙 땅덩이가 넓어 1920년대 호주에서 최초로 인구센서스를 했을 당시 부시 야생지역 인구가 당시 호주 전체 인구의 약 30%였다고 한다.

따라서 노동자간의 강한 연대의식을 바탕으로 한 임금협상에서 호주노동자들은 타국에 비해 빠르게 최저임금제를 실현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가이드라인을 굳게 지키려는 노동자간의 강한 연대의식이 발달할 수 있었다.

호주의 정치평론가 폴 켈리(Pall Kelly, 1947~)는 이를 두고, ‘호주만의 정착’(Australian Settlements)이라고 평한다. 그러나 공평한 정의(Social Justice)를 위한 호주의 사회규범인 메이트십에도 문제가 있었다. 1901년 호주는 독립을 하면서 비 백인계 노동자들에게 ‘영어받아쓰기 시험’을 강제로 실시하는데, 이는 점차 늘어가는 비 백인계 노동자들로 인한 노동시장의 잠식 우려 때문이었다. 1차대전 전후의 호주인구 중, 비 백인계 특히 아시안계의 비중은 약 1%였다. 1958년에 가서야 아시안계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한 이 영어받아쓰기 시험은 폐지된다. 이 제도의 폐해는 너무나도 커서 오늘날까지도 호주를 백인들만의 세상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

전쟁은 호주를 외부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호주남성들 위주의 메이트십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전통적으로 사회약자였던 호주여성들과 호주 원주민들(Aborigine)의 인권을 증진시키려는 사회운동과 맞물리면서 베트남전쟁 종전 후인 1970년대부터 호주의 메이트십은 좀더 포괄적인 의미로 확대된다.

한 예로 1970년대 초반, 호주 노동당당수였던 리오넬 머피(Lionel Murphy, 1922~1986, 호주의 정치인이자 법조인)는 일방 책임이혼제도(No-Fault Divorce)를 포함한 새로운 가정법(Family Act) 제정을 주창한다. 이때부터 이혼당사자들의 쌍방 합의 및 법적 판결에 의한 이혼제도가 일반적인 한국과 달리 호주는 배우자 중 어느 한쪽이 이혼을 선언하는 것이 곧 사실적 이혼상태를 의미한다. 즉, 심한 가정폭력에 노출되기 쉬운 여성의 인권을 크게 강화한 제도다. 반대로, 여성을 함부로 대하는 남자들은 거의 가산탕진(?) 수준에 이르게 만드는 제도다. 호주의 이혼율이 타국에 비해 높은 가장 큰 이유이다.

호주남자들만의 경쟁의식과 상호 신사협정과도 같았던 메이트십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계기는 1960년대부터 호주사회에 유입된 미국의 TV매체다. 같은 앵글로색슨 계열이지만, 외부세계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던 호주사회가 베트남전에 참전한 후 미국 TV가 호주안방에 유입되면서 호주의 페미니즘뿐 아니라 대아시아정책에도 커다란 전환이 이루어진다. 즉 전통적인 메이트십(mateship)에 더하여 새로운 우정정책(Friendship)으로 변모한다. 이는 외부세계와 고립노선을 걷던 호주사회가 대외적인 개방 노선을 택하는 시기와 맞물린다. 1980년대 한국에서도 개봉된 바 있는 호주영화 <크로커다일 던디>를 기억하는가? 마치 미국 뉴욕 한 가운데에서 시골 촌놈(?)으로 취급받던 호주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1800년대 세계 각국에서 유입된 이민자들로 구성된 날것 그대로의 모습이던 호주사회가 건국과정(Nation Building)과 현대화를 거치는 동안, 메이트십은 가장 중요한 정신적 합의를 만들어낸다. 그 결과가 호주의 앤작 전설(ANZAC Legend)이다. 즉 국가가 참전을 요구했을 때 기꺼이 응했고, 전사 혹은 부상당했던 이들의 높은 사회적 충성심(Royalty)의 근본적인 사상 배경이 바로 메이트십이었다. 그래서 1차대전 당시 호주의 주요 일간지 중 하나인 <시드니 모닝 헤럴드>(Sydney Morning Herald)의 전선 특파원을 지낸 호주 시인 반조 패터슨(Banjo Paterson, 1864~1941)은 종전 후 이렇게 말한다.

“전쟁이 끝난 후,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전통을 갖게 되었다”(by the end of the war, we ourselves had a tradition)

2007년 3월 필자가 호주 이민생활을 시작할 당시 가졌던 호주사회를 바라보는 가장 기본적인 궁금증 하나가 “마치 한국을 비롯한 동양사회의 기본적 사회규범인 유교사상(Confucianism)과 같이, 호주사회를 움직이게 하는 기본철학은 무엇인가?”였다.

그것은 호주사회 및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메이트십이다. 이 말 한마디에 호주의 모든 평등사상이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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