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 Jang의 톡톡튀는 호주이야기⑧] ‘호주판 북풍사건’ 소련간첩 페트로브

페트로브의 아내, 에브도키아가 소련 비밀경찰에게 강제로 끌려가는 모습을 담은 신문사진

[아시아엔=장영필 <아시아엔> 호주특파원] 전쟁이 끝났다. 블라디미르 페트로브(Vladimir Petrov)는 2차대전 종전 직후 연합군의 입장에 섰던 조국 소련(Soviet Union)의 정치상황에 더욱 민감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종전 후 벌어진 조국의 내부 정치갈등은 새로운 전쟁이었다.

1953년 3월 스탈린이 사망하였다. 호주 캔버라 주재 소련 외교관 신분인 페트로브의 속내는 더욱 복잡해졌다. 얼마 후, 페트로브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베리아(Lavrentiy Beria, 1899~1953) 또한 소문도 없이 사라졌다. 사태는 페트로브에게 갈수록 심각하게 돌아갔다.

“베리아가 실각하다니···.”

페트로브는 망연자실했다. 어쩌면 스탈린에 이어 흐루시초프가 동독에서의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무력진압한 이후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낌새를 눈치챈 페트로브의 폴란드 친구 비알로구스키(Bialoguski)가 페트로브를 찾아온다. 그러자 페트로브는 고민에 빠진다. 베리아가 실각한 이상 소련으로 돌아가 보았자 자신이 베리아라인으로 규정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결국 중대한 결정을 한다.

“망명한다. ASIO(호주국가정보부)에 선을 대다오. 내게는 호주 전체 소련간첩망 자료가 있다. 오픈하겠다.”

“와이프는?”

“혼자 간다.”

이미 페트로브는 당의 명령에 따라 살게된 아내 에브도키아(Evdokia)가 자신을 감시해온 MVD(소련비밀경찰조직)의 연락책이었음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드디어 1954년 4월3일 1951년부터 호주 캔버라 주재관이던 페트로브는 2차대전 이후 호주에서의 첫 소련망명객이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호주의 멘지(Robert Menzies, 1894~1978) 수상은 의회에서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힌다. 1920년 소련 볼세비키혁명의 불길을 타고 창설된 호주공산당(The Australian Communist Party)의 정치적 약화를 가만히 볼 소련이 아니었다. 멘지 수상의 발표 즉시 소련 KGB는 예상대로 2대의 비행기를 시드니공항에 착륙시킨다. 그리고 이들은 호주 ASIO보다 한발 빠르게 움직여 페트로프의 아내를 강제로 소련행 비행기에 태운다.

드디어 2차대전 종전 후 호주는 물론 전 서방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페트로브 사건이 터진 것이다. 당시 연방선거를 앞두고 있던 호주 여당측 수뇌부에서는 페트로브의 망명신청을 두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호주가 미국과 군사동맹 관계이기는 하나 2차세계대전의 승전국인 소련의 정치적 압력 또한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 직후 높아진 실업율과 사회불안은 곧 있을 총선에서 노동당(The Labour Party)의 압승을 충분히 예상케 하였다. 소련과의 어떤 협의도 없이 호주의회에서 페트로브의 정치망명을 선제적으로 발표한 것은 자유당(Liberal party)의 정치적 약세를 우려한 멘지 수상이 발휘한 신의 한 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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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도키아의 벗겨진 신발(아래)과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페트로브

1950년까지 호주공산당은 1920년 창설 이후 그다지 민심을 크게 끌지 못하였다. 그러나 에브도키아가 KGB 요원들에 의해 강제로 맨발로 끌려가는 모습을 담은 사진 한 장으로 인해 여론은 이미 강력한 반공산주의쪽으로 기울어져 버렸다. 이 흐름을 간파한 멘지 수상은 중간 급유를 위해 호주 북쪽 다윈(Darwin)비행장에 잠시 머물고 있는 소련비행기의 이륙을 금지시킨다. 그리고 페트로브의 아내 에브도키아의 정치망명을 허락한다. 나아가 페트로브와도 통화를 하도록 배려한다.

아내가 말한다.

“페트로브, 나는 당신을 사랑했어요. 당신이 호주에 남기를 바랬어요.”

“아니? 그럼 ASIO에 내 정보를 먼저 흘린 이가 당신이란 말인가?”

소련비행기에 강제억류되어 있던 아내 Evdokia는 멘지 수상의 주선으로 극적으로 연결된 기내전화 통화에서 당이 지정한 피감시자였던 남편 페트로브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다. 비록 한때 서로가 감시자의 신분이었지만, 이들이 이념의 국경을 넘어 비행기에서 같이 내리는 순간, 다윈공항에는 수많은 인파들이 모여들었다.

마침내 이들은 멘지 정부의 강력한 정치결정에 힘입어 성공적으로 호주에 정착하게 되고 페트로브는 1991년, 아내 에이브도키아는 2002년 멜버른에서 생을 마친다.

드라마틱하지 않나? 1954년 호주에서 벌어진 1950년대호주 이념전쟁의 상징적 사건이던 이른바 ‘페트로브사건’의 전말이다.

이들은 호주망명에 성공하지만 이 사건의 여파는 크게 호주사회를 뒤흔들었다. 1920년 호주에서는 로마카톨릭(Roman Catholic)의 정치적 후원 아래, 호주공산당(The Australian Coomunist Party)이 결성된다. 그러나 일찌기 산업혁명을 겪은 영국사회의 정치사회적 프레임이 강했던 호주사회에서 1950년대 초반까지 호주공산당의 정치적 입지는 미약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자력으로 산업혁명을 성공시킨 후, 노동자 및 중산층의 사회적 근로조건과 복지조건을 안정적으로 정착시킨 영국사회를 닮아 온 호주사회 또한 외부 정치이념의 수혈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2차대전 후 승전국 자격이던 구 소련의 입장은 달랐다. 종전 후 호주 내 소련의 비밀노선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간파한 멘지 수상은 호주 내 공산당운동을 폐지하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한다. 법안은 통과되었으나 호주 대법원 판사 7명 중 6명이 비헌법적이라는 의사를 밝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1년 멘지 수상은 ‘호주공산당 폐지결정’을 놓고, 국민투표(Referendom)에 부치자고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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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로브 사건 당시 호주의 멘지 수상과 정적관계였던 1950년대 호주노동당 당수 에벗(Evatt)의 생가 모습.

그러자 에벗이 이끄는 노동당(Labour Party)은 “시민이 가질 수 있는 자유스런 사상의 저지”라고 주장하면서 반대의사를 밝힌다. 결국 멘지 수상 주장대로 국민투표가 실시된다. 그러나 멘지 수상을 비롯한 자유당 인사들의 예상과 달리 노동자계층의 입김이 강했던 전후 호주사회는 총투표자 중 찬성은 2,317,927명으로 반대(2,370,009)에 못미쳐 입안은 실패한다.

멘지 수상을 비롯한 자유당 노선에서는 이런 결정을 두고 “공산당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책략의 결과”라면서 ‘Red Fear’라고 규정한다. 이런 와중에 페트로브가 정치적 망명을 선택한 것이다. 결국 페트로브 사건은 멘지 수상과 자유당노선에게 역전의 정치발판을 마련해 주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정작 정치적 여파는 에벗 박사가 이끄는 노동당이 더 컸다. 1901년 호주독립 당시 온건파인 아일랜드 카톨릭과 수직적 계급구조에 익숙한 로마카톨릭 양대 세력의 정치적 후원 아래 탄생한 호주 노동당은, 페트로브 사건의 정치적 영향 및 결과를 놓고 내부 조직갈등에 빠졌다. 로마카톨릭 세력이 중심이던 강경파 호주노동당 노선은 온건파였던 노동당 당수 에벗 박사의 미숙한 정치행보를 공격해 결국 Irish Catholic이 중심이 된 온건파 노동당 세력은 분당한다. 마침내 1959년 호주민주노동당(Democratic Labour Party)이 결성된다.

그러나 호주시민들에게 비친 페트로브 사건을 통한 공산주의 노선의 두려움은 점차 커져만 갔다. 게다가 구 동독 및 소련체제의 동구유럽에서 밀려들어온 유럽계 이민자들의 반공산주의 흐름과 더해져, 1972년까지 치러진 총 6번의 호주연방 선거에서 민주노동당(DLP)은 연속으로 패배, 집권을 하지 못한다.

장영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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