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필의 톡톡튀는 호주이야기④] 호주 민주주의 이끈 ‘강제투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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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투표임을 알리는 고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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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자 선거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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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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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서 본 두표소 모습

[아시아엔=장영필(영문명 Phil Jang), 자유기고가, 시드니공업학교 도서관 사서] 1800년대, 호주사회는 ‘날것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1850년대 이후, 영국의회는 호주의 각 주(State)에 대한 자치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웬만하면 알아서들 잘 살도록!” 한 것이 영국정부의 속마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호주경제의 산파역을 해온 금광산업(Gold Rush)이 시작되면서 영국을 비롯한 전세계의 다양한 노동자계층이 밀려들었다. 그야말로 호주는 인종집합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 한국에서도 개봉된 적이 있는 <내일을 향해 쏴라!>라는 영화를 기억하는가? 폴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연한 1860년대 미국 서부개척시대의 전설적인 은행강도이자 총잡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 경찰의 추격을 피해 찾아든 건물 밖은 멕시코 경찰이 사방으로 둘러싸고, 더 이상 갈 데 없는 처지. 마치 내일은 없는 것처럼 살아온 이들의 마지막 대화는 이렇다.

“우리 운 좋게 여길 빠져 나가면 다음에는 호주로 튀자!”

그리고 두 사람은 각자 총을 빼들고 문밖으로 뛰쳐나간다. 그들은 과연 호주로 튀었을까?

그들처럼 1850년대 중반경부터, 전 세계의 다양한 직업 배경을 가진 이들이 호주로 밀려든다. 아, 오해 마시라. 호주로 밀려든 신규 이민자들 중 위와 같은 사례는 극히 일부일 뿐이라고 호주 역사가들은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배울 것만 배우고 딴 나라 역사에 대해 너무 깊이 따지지 말자.

사회 구성원들이 많아지면, 소유한 자본규모에 따라 자연스럽게 ‘계급’이 형성되는 법.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배경으로 한 신규 노동자들이 호주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리잡는 동안 또 다른 쪽에서는 호주사회 지도층 계급의 시초를 이루는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1835년, 영국 휘그당(Whig Party) 노선을 따르려자 W.C.Wentworth(1790~ 1872, 호주의 탐험가이자 정치인, BlueMountains 초기 탐험자들 중 1인)가 주축이 된 호주애국당(Australian Patriotic Party)이 생겨났다. 호주 최초의 정치단체다. 호주애국당의 초기 정치노선은 뉴사우스웨일즈주의 민주정부 구성이었다. 이때부터 호주 노동자들 사이에 민주정부(Democratic Government)라는 개념이 전파되었다. 필자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호주 역사책에 있는 이야기다.

그 때 그 시절, 호주에서 한몫 잡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많은 이민자들이 유입되면서 당시 미국사회 또한 민주정부가 싹트고 있었다는 것을 호주 사회는 알고 있었다. 그 결과 1840년 10월 31일 호주 애들레이드 시청에서 600명이 지역 현안을 놓고 투표한 것을 시작으로, 1843년 뉴사우스웨일즈주에서 호주 최초의 의회투표(Parliament Vote)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전술한 대로 당시 ‘날것 그대로의 사회’였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투표자격은 21세 이상인 성인남자 중 200파운드를 소지하였거나 20파운드 가치에 해당하는 집을 소유한 이들로 제한하였다. 그러면 이 자격제한에 벗어나 있었던 이들은? 하루 일한 것 가지고 일주일 살아야 했던 ‘날것 그대로의 삶’을 살고 있던 이들이다. 그런 이들에게 투표란 것은 그저 귀족들의 행사였던 것이다.

선거가 끝났다. 가뜩이나 없는 것도 서러운데 투표자격을 제한한 불평등한 선거는, 가진 것이라고 해봐야 ‘깡다구’밖에 없는 일반 노동자들을 더욱 화나게 하였다. 게다가 호주 초장기의 선거모습은 그야말로 1960년대 한국의 “못살겠다, 갈아보자!” 식의 관권개입은 물론 한 사람이 하루에 서너 번 투표장에 가질 않나, 찍어 놓고도 누굴 뽑았는지도 모르는 ‘선거 사업’의 미개척 시대였다. 그래서 숱한 논쟁 끝에 1856년 호주식 비밀 투표용지(secret ballot)가 탄생한다. 즉 입후보자의 이름을 적은 주정부 운영의 투표방식이다. 이것이 훗날 호주식 무기명 비밀 투표방식으로 알려져 세계 각국으로 유행된다.

전 편에서도 다루었듯이 1901년 1월 호주는 독립을 선언한다. 그리고 같은 해 3월30일 호주 최초의 연방선거를 통해 초대 수상으로 에드먼드 바튼(Edmund Barton, 1849~1920, 호주 초대 수상이자 호주 연방대법원 창시)이 선출된다. 그러나 막상 독립은 했지만 기초적인 사회 기반 형성은 아주 미흡한 시절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독립 이전부터 인정되던 ‘우편 및 부재자 투표’(Postal and Absent Voting) 때문에 정확한 유권자 수와 득표율 집계를 알기 힘들었다.

이때 한 정치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처럼 민주사회를 만들려면 투표만큼은 누구나 해야 한다. 누구는 일 바쁘다고 빠지고···. 그런 인간들이 투표 끝나고 나면 제일 말이 많아! 투표는 다같이 해야 한다.”

그러자 다른 정치인이 답한다.

“당신 말이 맞기는 맞는데 아다시피 숲에서 사는 이들도 많고 떠돌아다니는 이들도 많은 마당에, 누가 유권자인지 먼저 알아야 투표용지를 머릿수만큼 인쇄할 것 아닌가? ‘유권자 등록제도’부터 만들어야 한다.”

그 결과, 1911년 호주에서는 “유권자 등록은 강제적으로 의무화하고, 투표는 자유의사에 맏기는” 제도(Compulsory Enrollment)가 생겨난다. 또한 선거일은 토요일에만 실시하고, 공정한 선거캠페인을 위해 입후보자들의 선거비용을 신문에 공개하기로 하였다.

강제적으로 유권자 등록을 하도록 한 결과, 1922년 총선에서 정확한 유권자 집계가 가능하여 총 유권자 중 59.38%가 투표에 참여하였다는 결과를 얻었다. 그러자 호주 연방정부는 1924년 강제투표제를 실시한 결과, 1925년 연방선거에서 총 유권자 대비 91.31%가 투표하였다. 물론 강제투표제를 실시하기까지 많은 반대가 있었다. 그러나 호주에서 강제투표제가 정착된 배경에는 호주 초창기 시절부터 있어왔던, 호주 노동자들의 평등의식이 바탕이 되었다.

“누군 돈 있다고 투표하고 누군 돈이 없으니 투표하지 마라, 그건 안 된다.”

초창기 호주인들이 가졌던 평등의식은 호주의 선거개표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호주 또한 연방선거가 처음으로 실시된 때인 1919년 이전만 해도,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 이가 깃발을 꽂는, 즉 다득표자 우승방식(first past the post)이었다. 그러나 ‘갈 데까지 가보는 데 익숙한’ 일반 호주 노동자들의 정서는 1919년 선호도가 높은 과반수 득표자가 선출되도록 하는 선호순 투표(Preferential) 제도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개표방식은 현재까지 호주선거에서 사용된다.

여기서 ‘선호도 우선 투표방식’을 잠시 설명하자. 예를 들어 선거에 출마한 3개 정당이 있다고 치자. 노동당(Labour Party), 자유당(Liberal Party), 그리고 제3당이 그것이다. 만일 1차 투표 결과 과반수 득표를 한 당이 하나도 없을 경우, 그리고 제3당이 최저득표를 한 경우, 제3당의 득표율을 가지고 다른 당들에게 1차득표 비율대로 재배분한다. 그래도 어느 한 정당의 과반수 득표가 채워지지 않으면, 2차 집계에서 최하위를 기록한 정당의 득표를 나머지 당으로 몰아주어 최종적으로 과반수 득표율을 채워준다. 그리고 이 당이 최종 승리를 거머쥐게 된다. 이렇게 하는 배경은 강제투표제 하에서 사표(Dead Ballot)가 하나도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하다 보니 호주의 모든 선거는 다들 눈 부릅뜨고 진행하는 수작업 집계방식이어서 선거 후 며칠이 지나서야 결과를 알게 된다.

호주의 선거제도에 관한 역사적 배경을 살핀 것은 호주 역사 초창기부터 형성된 호주사회의 사회적 규범(Social Norm)인 일종의 평등의식이 어느 나라보다 강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즉 호주 역사의 커다란 분기점이었던 1850년대 이후부터 호주사회의 기본적 인구층을 이루었던, 노동자계층과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고자 했던 정치 엘리트 계층은, 영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영국과는 또 다른 평등사회’를 만들려는 의식이 강했다. 그 결과, 1924년부터 실시된 강제투표제라는 방식을 낳았던 것이다.?공식자료에 따르면 오늘날 호주 정치인들의 투명성은 세계 제7위다.

장영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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