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 Jang의 톡톡튀는 호주이야기①] 영국서 도망나온 죄수들이 만든 나라?
시드니는 호주 역사의 시작점이다. 외부세계에 호주는 죄수들이 만든 나라로 알려져 있다. 맞다.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1700년대 중반, 대영제국의 탐험대가 호주 대륙을 발견한 이후 영국은 산업혁명 이전의 매우 혼란스런 시절을 겪고 있었다. 그런 사회의 부산물인 죄수들을 수용하기 위한 교도소가 점차 부족해지자, 정치인들은 호주대륙을 또 하나의 죄수 수용소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그 결과, 1700년대 중반부터 영국 본토에서 보내진 죄수들은 1850년대 호주의 광산붐이 있기까지, 수만명이 호주에 수용됐다. 이후 호주에서 형기를 마친 이들 대부분은 영국본토로 돌아가지 않고, 호주 여러 곳으로 흩어져 살게 된다.?호주 역사에서 가장 큰 분기점은, 1850년대 골드러시다. 이 시기에 우리가 주목할 것은, 전 세계에서 밀려들어오는 신규 이민자들 가운데에는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초기 호주문화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 시작점이 시드니다.
1850년대부터 시드니의 문화예술인들은 그들의 수많은 작품을 통해, 호주의 문화적 사회적 국가적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크게 일조한다. 특히 광대한 자연을 배경으로 한 호주 토속문학의 시작뿐 아니라, 미술 및 음악 분야가 이 때부터 발전하기 시작한다.?1, 2차 세계대전, 경제 대공황 등 크고 작은 사회적 변동 시기에도 문학인들은 많은 기여를 한다. 특히, 2차대전 이후 유럽에서 다시 제2의 이민세력들이 몰려드는데, 그 가운데에는 향후 호주 문화예술의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데 크게 일조하는 그룹도 포함된다.?베트남전 종전 이후, 호주사회는 ‘백호주의’를 폐지하고 대외적으로 전면에 나서게 된다. 이때부터 호주 문화예술계는 세계와의 다양한 교류는 물론, 다문화권 예술과 만나게 된다. 이런 흐름의 중심에는 1972년 호주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패트릭 화이트가 있다.?특히 필자는 호주역사의 시대적 배경을 중심으로, “과연 한 국가의 엘리트그룹들이 일반대중을 생각하는 제대로 된 정책을 펼쳤을 때 어떤 차이가 나는지?”에 대하여, 호주문화의 여러 모습을 한국인 시각에서 재구성했다. <편집자>
글 싣는 순서
- 독립국가의 시작
- 1차 세계대전의 총알받이
- 미국, 유럽보다 몇 배 힘들었던 호주의 경제공황
- 친형제에게 배신당한 호주
- ‘까’ 하면 까야 했던 호주
- “우리도 인간답게 살자!” 자존, 자립운동의 시작
- 호주로 오세요, 호주 살기 좋아요
- 제일 복잡한 족보, 제일 행복한 나라
- 역시 부동산이야! 땅장사 왕국
필자 소개
장영필은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에서 출판 기획 및 집필, 특히 전자책 출판기획 등의 일을 20년 하였다. 10년 전 호주로 이민 가 시드니공업학교 도서관 사서를 하며 주로 SNS를 통해 글쓰기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아시아엔=장영필(영문명 Phil Jang), 자유기고가, 시드니공업학교 도서관 사서] 때는 바야흐로 1770년대 쯤, 저 멀리 조선이라는 나라에서는 영조대왕의 손자이자 오날날 한국 TV드라마의 단골소재 중 하나인 ‘비운의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올랐다. 정조가 자신도 아버지꼴 날까봐 ‘붕당정치’의 폐단을 없애고, ‘당파’라는 말을 없애려고 할 무렵, 지구 반대편 영국의 왕 조지 3세는 제임스 쿡(James Cook)이라는 해군 함장에게 특명을 하달한다.
“요새 말이지, 미국 양키들이 독립을 하는 바람에 내가 아주 심기가 불편해. 그리고 말이야, 그 영향인지는 몰라도 런던 감옥이 죄수들로 넘쳐난단 말이지. 다들 겁대가리를 상실한 것 같아. 그래서 말인데, 지난번에 쿡 선장이 말한 호주라는 데 말야 거기 좀 어케 잘 요리해서(?) 감옥 시설도 새로 만들고….내가 바다 건너는 인건비는 충분히 줄께!”
그때나 지금이나 직업군인들에게 오지근무는 승진의 기본 조건. 해군제독 승진심사에서 한번 물먹은 바 있던 제임스 쿡은 바다 건너는 인건비까지 준다는 왕의 명령에 속으로 잘 됐다 싶어, 그 자리에서 “Call!”을 땡긴다. 그로부터 약 8개월 후, ‘제임스 쿡 선장’이 이끄는 선단이 1770년 4월, 170여명의 죄수들과 함께 현재 시드니 근처 보타니 베이(Botany Bay)에 첫 상륙을 한다. 호주역사의 시작이다.
호주정부 차원에서도, 호주역사의 시발점을 호주 시드니 항구에서부터, 시드니 서부쪽에 위치한 블루 마운틴(Blue Mountains)까지 해당하는 지역을 공식 인정한다. 이 두 지역의 초창기 역사가 곧 호주역사의 시발점인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1989년 옥스퍼드대가 출판한 <Australian studies?a survey> 84쪽에서도 확인된다.
그때부터 시작한 호주의 역사를 사학자 폴 켈리는 <The End of Certainty?Power, Politics & Business in Australia>(1992)에서 다음의 세 단계로 구분한다. 즉
△백인들이 호주 땅을 찾아내고 정착했던 19세기 초기 기반구성 단계 △호주 독립선언 후 국가 설립단계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다.
영국여왕과 맞짱 떠서 승리한 미국이 독립한 이후, 영국 왕실은 넘쳐나는 런던 감옥의 죄수들을 처리하기 위해 또 다른 식민지를 찾으려 했다. 1770년 제임스 쿡 선장의 첫 호주 상륙 이래, 1868년까지 영국정부는 약 16만명의 죄수들을 호주로 이송하였다. 거기엔 여러 가지 좋은 점이 많았다. 워낙 거리가 멀어서 일단 보내고 나면 소식이 없어 좋고, 캐나다와 같이 미국과 한통속이 되어 영국여왕에게 맞짱 뜨려고 하질 않아서 좋았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흔히 호주는 죄수들이 만든 나라라고 한다. 맞다. 죄수들, 즉 전과자들이 만든 나라였다. 어떻게 만들었느냐? 호주에서 형기를 마치거나, 사면을 받은 이들 중, 본국으로 돌아가 봐야 가난한 집구석에 얻어먹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이들은 호주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1850년대 중반까지 상당한 인구 비중을 차지하였다.
자고로 사람이 사는 사회는 쪽수싸움이다. ‘가재는 게편’이라고 일단 내편의 쪽수가 많으면 어딘가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큰집’에서 교육받고 나온 이들이 사회적으로 점차 많아지자 당시 시드니 분위기가 상당히 터프해졌다.
상상해보라. 만일 종로거리를 걸어가는데 “형님! 식사 잘 하셨습니까?” 하면서 큰절을 하면 어떨까 하고. 골드러시라는 광산개발 붐이 일기 전인 1830년대까지 호주에서 그랬다. 그리고는 그런 이들이 술집에서 주로 하는 말이
“나, 웬만하면 이런 말 안 하려고 헀는데 말이야! 유전유죄 무전무죄! 나 사실 고작 빵 하나 털었다고 14년을 살았어! 세상에 이런 나라가 어딨어!”
그러자 옆에서 같이 럼주(Rum)를 마시던 한 친구가 이마를 팍 치면서 하는 말 “어이구, 이 무식한 놈아. 무전유죄여, 너 그때 니가 머리가 나빠서 망 잘못 보다가 다같이 달려들어 간 거 아니여, 글구 변호사 비용도 없었잖여?”
그들 뒤에서 그 소리를 듣고 있던 해병대 비슷한 복장을 한 장교양반이 또 외친다.
“어찌되었든 한번 죄수는 영원한 죄수여!” 그러자 주변에있던 큰집 출신들이 다같이 들고 일어나 외친다.
“우리가 남이가?”
그 말 한마디에 주둥이 잘못 놀린 장교는 술집에서 집단으로 몰매맞고 쫓겨난다. 그리고는 큰집 출신들끼리 외친다. “우리가 말여 시방 이럴 때가 아녀. 우리도 우리의 권리를 주장해야 것어. 우리가 시방 죄수여? 그거 아니잖여! 앞으로도 계속 우리 후배들이 배출될 건데 말여?”
그래서 그들은 점차 정치에도 참여한다.
문제는, 교도소 관리 시스템이었다. 죄수들이 점차 많아지자, 영국 본토에서 관리들이 많이 와야 하는데,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당시 영국 사회에서 ‘공무원’이라는 막강한 철밥통을 가지고 있는 이들 중 누가 목숨 걸고 이런 오지로 오겠는가? 그래서 호주 제2대 총독을 지낸 맥콰리경은 죄수들 중 형기를 마친 이들 가운데 ‘상태 좋은’ 이들을 골라 일종의 자치권을 준다.
이런 이들 가운데는 일종의 간이법정에서 판사 역할을 한 이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가재는 게편이요, 과부 사정은 기둥서방이 안다고 법정에서 이런 일도 있었다.
상점 물건을 뽀리친(절도한) 어느 아이의 엄마(죄수): “어이, 형님!, 나 사실 애들 좀 먹이려고, 과자 몇개 좀 뽀리쳤는데…, 어케 좀 안될까?
전직 죄수이자, 지금은 판사 조수로 일하고 있는 이: “어이, 깔치! 시방 난 말여, 왕년에 니 하고 같이, 하이드파크 죄수 막사에서 지내던 그 ‘형님’이 아녀!, 일단 존칭부터 좀 바꿔봐!”
애 엄마: “워메…, 지랄. 나가 뭐 배운 게 있어야 유식한 말을 하지…. 그나 저나 나가 만일 다시 감옥 가면 애들 밥은 누가 해먹인댜? 워쩌지?”
전직 죄수이자 판사 조수(갑자기 목에 힘을 좀 빼면서: “내 그 마음 알지. 그거 내가 해봐서 아는데…아주 가슴아픈 일이여. 그럼 말이여 이케 해봐. 주말에는 감옥에 오고, 주중에는 니 하던 대로 애들 먹을 거 좀 어디서 계속 벌어”
이렇게 해서 생겨난 특이하고도 아주 융통성 있는 제도가 ‘주말구류형’(Periodic Detention)이다. 2014년 폐지되었다. 그러면 그전까지는? 아주 인간적인 제도다. 이런 식으로 호주 초창기의 여러 융통성 있는(?) 문화가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
호주의 모든 정치구조는, 호주헌법에서 비롯된다. 즉 호주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정치행위를 규정한 ‘rulebooks’이다. 모든 나라가 초기헌법이 만들어질 당시의 정치사회적 배경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호주의 경우 흔히 말하는 ‘웨스터민스터’(Westminster)라는, 영국 의회정치 구조가 근간이다.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구조가 생겨난 역사적 배경에는, 영국의 왕실과 영국의 지방 성주들로 구성된 의회 간의 오랜 정치투쟁이 있었다.
영국이 야만인 생활과도 다름없었던 ‘쌍팔년도’ 시절을 거친 후인 1649년 당시 영국 왕이던 챨스 1세는 올리버 크롬웰의 공화정치에 의해 밀려난다. 수년 후 크롬웰이 죽자 다시 왕실의 찰스 2세가 군주제(monarchy)를 회복하는데 이때부터 Catholic을 주장하는 왕과 Protestant를 주장하는 의회가 다시 ‘종교문제’로 내전까지 치fms다. 1689년 의회가 승리하여 Bill of Right(권리장전)을 통과시킨다. 그리고 다시 왕을 의회 아래로 복속시킨다. 이것을 찰스 2세의 모친인 Queen Mary가 동의한다. 이때부터, ‘웨스터민스터 의회 정치구조’라는 개념이 생겨나고 법적인 구속력을 가지게 된다.
1689년 고기도 먹어본 놈이 많이 먹는다고, 영국의회와 왕은 서로의 권력을 나누어 갖고 누리기 위해 상호 공생의 길을 모색한다. 즉, 지역구(head of states)들은 왕의 군주제를 인정하고, 왕 또한 지역구들의 ‘영업권’(?)을 인정한다. 양측은 법안 제정 등과 같은 큰 일(통치권력)은 의회에서 통과되도록 하는 절차를 만든다. 이때부터 권력의 분립(separation of powers)이 시작되고, 영국의 왕은 이에 대해 명목상의 견제장치를 만든다. 영국의 입헌군주제(Constitutional Monarchy)의 시작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상태에서, 영국의 바다 건너에서 오늘 호주와 미국과의 헌법 구조상 근본적인 차이가 나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다. 오랜 기간 왕과 의회가 내전까지 치르면서 권력투쟁을 하던 시절, North America 나 호주나 주 거주인들이 ‘학교출신’로 구성된, 다같은 영국 식민지였다. 그런데 그 당시 영국본토와의 무역에 의존하여 먹고 살던 호주와 달리, 미국은 좀 좋았는지 영국 여왕에게 목소리를 내면서 대들었다.
“시방, 우리가 이 나이에 세금 내게 생겼어? 글구 말야, 우리 전국구 오야붕 말여, 시방 연세가 몇이여? 긍께, 우리 좀 냅 둬! 여긴 우리 나와바리여!”
드디어, 전국구인 영국여왕님이 이 말에 열 받아 북미 지역의 드센 지역구들과 한판 싸움(미국 독립전쟁, 1775~ 1783)이 붙었다. 결과는 가는 세월에 장사 없다고, 대차게 개긴 미국의 승리였다. 그래서 그때부터 미국은 영국본토와는 다른 독자적 헌법을 가지게 된다. 미국 내에서 각 지역구들의 영업권을 인정하는 토마스 제퍼슨이 기초한 ‘연방주의 헌법’이다.
1849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골드 러시’가 시작되었다. 바다 건너 호주에서 그 소식을 전해들은 에드워드 하그리스라는 이가, 한몫 챙기고자 캘리포니아로 건너간다. 그러나 발 빠른 이들이 이미 쓸 만한 땅들을 분양받은 후라 별 재미를 못 본 하그리스는 광산 채굴기술만 익힌 후, 다시 호주 뉴사우스웨일즈로 귀향했다.
그 다음 해, 오늘 미국과 마찬가지로 다같이 쌍권총 들고 살던 서부 개척시대에 목숨 걸고 배운 기술을 썩히기 아까운 히그리스는 시드니 서부 블루마운틴에서 안쪽으로 1시간 떨어진, 배서스트(Bathurst)에서 호주 최초로 광맥을 발견한다. 다시 바다 건너에서 이 소식을 들은 히그리스의 미국 캘리포니아 친구들이 호주로 몰려들었다. 이것이 최초의 미국과 호주간 문화교류의 시작이다.
골드러시가 호주의 각 지역에서 발현하자 예로부터 각 지역별로 크게 터잡고 있던 상인들, 농장주들, 그리고 광산에서 큰 재미를 본 지역구들이 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부터 제조업이 발달하기 시작한 빅토리아주의 멜번 지역구들과, 영국과의 상업 중심으로 성장한 뉴사우스 웨일즈주의 시드니 거상들 간에 무역관세(Tariff) 정책을 놓고, 보호무역주의(제러미 벤덤과 존 스튜어트 밀의 영향을 받은 멜번측)와 자유무역주의(Free trade) 간에 정치투쟁이 벌어졌다.
그 결과 그 때부터 미국과 문화교류가 시작된 호주는 미국이 주창하는 연방주의에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각 지역구들이 보기에 연방주의는 자기네 기존 권역의 영업권을 굳히기 위한 좋은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미국 내에서 한 먹물하던 프랑스 작가 토크빌이 쓴 <미국의 민주주의>(Democracy in America)라는 책이 발간과 동시에 재판 1쇄를 찍자 영국 작가인 제임스 브라이스가 1888년 <American Commonwealth>를 발간하여, 당시 호주의 정치인이던 알프리드 디킨(Alfred Deakin)이 1890년 영국 런던에서 브라이스를 만났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랬다.
“난 당신 책 제목이 더 맘에 들어. 아무래도 우리 호주는 ‘영국과의 추억’을 상기시켜 주는 ‘Commonwelath’라는 제목이 더 맘에 와 닿는 것 같아.”
영국에서 돌아온 Alfred Deakin은 그때부터 영국 의회제도와 상원(Senate)과 같은 각 지역구들의 입지를 굳혀주는 몇가지 미국헌법 조항 등을 엮어 1900년 최초의 호주헌법 초안을 들고 영국의회로 가서 싸인해 줄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멜번 지역구’와 ‘시드니 지역구’가 공동합의하여 각자의 권역에서 100마일 떨어진, 오늘날의 캔버라에 호주 최초의 수도를 만든다. 그리고 1901년 독립을 선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