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필의 톡톡튀는 호주이야기⑤] 아일랜드계 카톨릭 vs 영국계 기독교 ‘대리전’ 양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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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외곽 베럴에 위치한 영국성공회 계열의 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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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하이드파크에 있는 세인트 메리 성당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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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메리성당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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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페딩톤에 있는 호주 육군부대 안 예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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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군교회의 홍보포스터. “희망의 우리 군대”라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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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스트라스필드에 있는 한국 조계종 산하 시드니 정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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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외곽 베리에 위치한 앵글리칸 처치 앞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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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의 어번 지역에 위치한 이슬람교 사원

[아시아엔=Phil Jang <아시아엔> 호주특파원] 인류사회가 형성된 이래, 인류는 많은 전쟁을 치르며 지내오고 있다. 숱하게 많은 전쟁들의 주요 원인 중 가장 흔하고 중요한 것은 ‘종교에 의한 전쟁’이다. 고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일반인들의 민도가 높지 않아, 성경이나 코란같은 종교문서를 읽을 수 있던 종교 지도자들은 당시 기준으로 사회적 엘리트 계급이었다. 이들 엘리트 계급이 가진 각자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숱하게 많은 인류 역사가 바뀌었고 그 결과에 따라 역사적 교훈을 얻기도 하였다.

그들이 얻은 교훈 중 하나로, 프랭크 브레멘은 저서 <행동하는 양심>(Acting on Conscience)에서, “시민은 그들이 가진 종교적 신념과 마찬가지로, 선과 악을 이야기할 수 있는 개인적 신념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숱하게 많은 전쟁을 겪으면서, 인류 스스로 “우리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싸웠던가?”에 대한 자의식이 발현된 것이다. 향후 이 현상은 프랑스혁명 정신의 산파역을 하였고, 휴머니즘의 시작점으로 연계된다.

중세사회가 점차 발전되고 동서양 간에 이동이 잦아지면서 다양한 종교·문화가 전파되었다. 그런데 잦은 외부문화 유입과 소통이 원활했던 유럽대륙과 달리, 17세기 영국은 가깝기는 하지만 유럽대륙과 분리돼 독자적인 자연신학(Natural Teology)이 발달될 수 있었다. 한 예로, 로마카톨릭의 영향 하에 있던 프랑스와 달리, 영국은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자유로운 종교적 사상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영국은 전통적으로 중세부터 ‘기사도정신’을 가진 곳이었다.

기사들은 당시 사회적으로 엘리트 계층이었으며, 이들이 가진 기사도정신은 자연신학과 만나면서 계몽주의를 낳게 된다. 그 결과, 1688년 영국의 계몽주의 사상은 당시 프랑스가 가지지 못했던 종교적 관용과 포괄성(inclusiveness)을 영국헌법에 명문화하도록 한다. 이것은 기독교가 영국사회의 사회·정치적 프레임을 갖추는 계기가 된다. 전통적으로 보수성이 강한 신학을 강조하던 카톨릭과 달리 다양한 개인의 종교적 신념과 자유정신을 강조하는 17세기 영국사회는 곧이어 벌어질 산업혁명을 전후로 자연과학이 발달한다.

역사학자인 스티븐 쉐핀은 저서 <진실의 사회적 역사>(The Social History of Truth)에서 “그들이 발전시키는 자연과학은 상대적으로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음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계몽주의가 발달한 17세기 영국은 일찌감치 해외 대륙탐험에 나서기 시작해 호주를 발견한다. 비슷한 시기에 오늘날의 미국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는 “단지 하늘이 도왔을 뿐”이라고 말했다. 반면 호주를 발견한 영국 탐험대의 선장이자 계몽주의자였던 제임스 쿡 선장은 호주대륙 발견을 “자신의 과학적 승리”라고 자평하였다고, 호주 사학자 힐러리 커레이는 <호주 종교의 역사>(Believing in Australia)에서 기록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호주대륙에 처음으로 상륙한 이들은 대체로 영국의 죄수들(Convicts)과 군인들이다. 점차 시드니에 영국에서 이송돼온 죄수들이 넘쳐나고, 형기를 마친 후 호주사회에 정착한 이른바 ‘자유정착인’(free-settlers)으로 인해, 18세기 초입부터 시드니의 인구는 늘기 시작한다.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이들은 종교의 힘을 빌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에 관심 갖게 된다. 그 결과, 죄수 출신들은 주로 카톨릭교회를 선호하고, 일반 군인들은 기독교교회를 설립해 시드니 사회의 종교 분위기가 발현된다.

1850년대 전후로 시작된 호주 광산 붐을 타고 유럽 각국을 통해 호주에 정착한 초기 이민자들은 그들의 민족이나 문화적 다양성만큼이나 다양한 종교들을 전파하기 시작한다. 역사학자는 이를 두고, “마치 군대에서나 볼 수 있는 초교파 통합교회(military chaplaincy)의 양태”라고 말한다. 전통적인 영국 앵글리칸교회를 비롯해 다양한 종교가 전파되자 1846년 당시 영국수상 골드스톤은 ‘민주적 요소’(Democratic Elements)를 강조하면서, 거의 난립에 가까웠던 시드니의 종교 분위기를 묵인하게 된다. 사실, 여기에는 호주가 지리적으로 모국인 영국과 상당히 떨어진 점이 크게 작용했다. 결국, 자유방임 사상의 계몽주의를 바탕으로 한 영국의 종교 분위기는, 호주 종교계 또한 자유방임을 한 것이었다.

결국, 초기 호주사회를 이룩한 사회적 바탕에는 종교의 힘이 매우 지대하였다. 특히 호주 카톨릭의 경우, 아일랜드 카톨릭의 영향이 컸다. 1700년대 영국의 왕정을 이끌던 올리버 크롬웰은 아일랜드와 북부스코틀랜드를 영국 정부 하에 두고자 억압 정치를 하였다. 그러자 이에 반발하는 아일랜드계 카톨릭 성직자들이 하나둘 호주로 이주해 온다. 이들 가운데는 1785년 발생한 ‘아일랜드 반란’에서 정치적 혐의를 뒤집어 쓴 몇몇 아일랜드 성직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1800년 제임스 해롤드, 제임스 딕슨, 피터 오닐이 그 경우다.

그러자 영국본토를 비롯한 아일랜드와 프랑스 등 유럽대륙에서 카톨릭계열의 성직자들이 점차 호주로 몰려든다. 물론 여기에는 프랑스혁명 당시 카톨릭사제들과 교회의 재산소유를 부정한 분위기가 크게 작용한 결과다. 이에 따라 뉴사우스웨일즈주에서 최초로 실시한 인구센서스에서 카톨릭 신자수는 당시 인구와 맞먹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리고 1890년대 이후, 아이리시계를 중심으로 한 호주 카톨릭은 기독교와 함께 양대 세력으로 성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호주 인구가 점차 늘고 종교인 또한 많아지면서 종교 헤게모니 또한 다양한 형태로 발현되기 시작한 점이다. 단적인 예로 마치 한국속담에 “집안에서 새는 바가지 바깥에서도 샌다”라고, 호주인의 모국이던 영국에서의 지역갈등은 호주에 와서까지도 이어졌다. 1880년대부터 카톨릭 인구가 점차 늘어나면서 호주 카톨릭 주요 인사들은 영국 본토세력들과의 정치적 싸움에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호주 원주민들의 권리를 찾아주는 캠페인을 펼친다.

전통적인 호주 기득권층인 영국 계열의 반대 입장에 서있던, 아일랜드계 호주 카톨릭은 1901년 호주가 독립을 선언하자 정치적으로 독자노선을 표명한다. 그리고 당시 생겨난 호주노동당과 연합해 1917년 이 나라의 징병제를 반대하는 노선을 유지한다.

영국계 기독교인들이 주류였던 1909년 호주정부는 카톨릭에 대한 자금 지원을 중단한다. 그러자, 이에 반발해 카톨릭 지도층 인사들은 아일랜드정부에 자금 지원을 요청한다. 아일랜드의 도움으로 수녀들이 도작하면서 뉴사우스웨일즈주에서 호주 카톨릭계학교가 최초로 설립된다.

이에 따라 성당과 병원, 그리고 학교시설이 잇따라 건립됐다. 세인트 메리 성당은 1821년 10월 29일, 당시 호주총독이던 맥쿼리 경이 지원하여 세워졌다. 그리고 시드니 최초의 카톨릭 주교였던 존 폴딩은 1847년 여자 죄수들을 돌보기 위한 학교를 설립했는데 수녀들이 학생들 교육을 맡았다. 1857년엔 세인트 빈센트 병원이 시드니에 세워진다

전통적인 영국 기독교 계열과 정치적으로 대립각을 유지한 채 1929년 호주 노동당 당수이던 제임스 스컬린이 호주 수상으로 선출된다. 스컬린은 아일랜드계 호주 카톨릭 정치인으로는 처음으로 호주 수상에 당선됐다. 영국 본토에서는 비록 영국계와 아일랜드계로 나뉘어 오랜 기간 쌍방이 치열한 정치투쟁을 하는 동안, 바다 건너 ‘또 다른 영국’ 호주에서는 영국계와 아일랜드계가 정치적으로 융합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하려는 영국 계몽주의사상을 바탕으로 한, 영국의회 정치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학자들은 해석하고 있다. 영국의회의 전통이란 무엇인가? 시민의 힘과 개인의 자유와 신념을 무시한 절대권력은 자리를 오래 유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역사적 경험에서 알게 된 것이다.

장영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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