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 Jang의 톡톡튀는 호주이야기②] 헌법제정···영미서 지역유지 입맛대로 골라

[아시아엔=장영필 <아시아엔> 호주 특파원] 1770년 제임스 쿡 선장(James Cook, 1728~1779)이 이끄는 영국의 탐험대가 호주대륙에 처음 상륙한 이후, 1800년대 초부터 호주대륙은 점차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호주로 오는 안정된 해상로가 영국사회에 알려지면서, 유럽 여러 나라에서도 호주대륙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부터 전세계로 퍼져나가는 중국인들도 호주 노동시장에 가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호주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으려는 영국 귀족들 또한 새로운 땅을 찾아 호주의 넓은 대륙으로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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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호주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의 한 식민지에 불과했다. 그러나 영국 본토에서 워낙 거리가 멀어 행정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자 영국 정부는 1825년 오늘의 한국의 제주도 마냥 호주대륙의 한 섬인 타스마니아(Tasmania)를 주(州)로 독립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1854년 ‘남호주(South Australia)’, 1851년 ‘빅토리아(Victoria), 1859년 ‘퀸스랜드(Queensland), 1829년 ‘서호주(Western Australia)’를 주(state)로 인정한다. 그리고 이들 각 주는 주의 행정권을 관장하는 독립적인 주 법률을 가지게 되는데, 당시 영국 법률에 기반한 것들이었다. 그런 후, 영국정부는 각 주에 대해 “알아서 책임성 있게 잘 살도록!”하면서, 책임정부의 실현을 당부한다. 그 결과, 그때부터 호주의 각 주는 주 사이의 무역거래 관세 및 세금체계, 자체 국방력을 개별적으로 갖게 된다.

1850년대는 호주역사의 큰 분기점이었다. 호주에서 가장 경제권이 큰 주였던 뉴사우스웨일즈주에서 일어난 광산붐이, 호주 전역으로 퍼지면서 각 주는 그때부터 춘추전국시대로 접어들었다. 영국에서 이주해온 귀족들의 자본과 중국인을 비롯해 세계에서 밀려오는 값싼 노동력이 합해져, 호주의 각 주에서는 광산업과 농축산업이 크게 발달하기 시작했다.

1849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도 골드러시가 시작되었다. 바다 건너 호주에서 그 소식을 전해들은 에드워드 하그리스(Edward Hargreves)라는 이가 한몫 챙기고자 캘리포니아로 건너갔다. 그러나 발빠른 남들이 이미 쓸 만한 땅을 분양받은 후라, 별 재미를 못 본 하그리스는 당시 미국이 가진 광산 채굴기술만 익힌 후 다시 호주 뉴사우스웨일즈로 귀향했다.

그 다음 해, 미국에서 힘들게 목숨 걸고 배운 기술을 썩히기 아깝다고 생각한 히그리스는 시드니 서부 블루마운틴(Blue Mountains)에서 안쪽으로 1시간 떨어진 배서스트(Bathurst)라는 곳에서 호주 최초로 광맥을 발견한다. 다시 바다 건너에서 이 소식을 들은 히그리스의 미국 캘리포니아 친구들이 호주로 몰려든다. 이것이 최초의 미국과 호주간 문화교류의 시작이다.

골드러시가 호주 곳곳에서 발현하자 호주 초창기 시절부터 각 주에서 크게 터를 잡고 있던 상인, 농장주, 그리고 광산에서 큰 재미를 본 지역유지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부터 제조업 발달이 시작된 빅토리아(Victoria)주의 멜번 지역유지들과 영국과의 상업 중심으로 성장한 뉴사우스 웨일즈 주의 시드니 거상들간에 무역관세(Tariff) 정책을 놓고 보호무역주의(Jeremy Bendam과 John Stuart Mill의 영향을 받은 멜번측)와 자유무역주의(Free trade) 간에 정치투쟁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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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이 발달하고 시장이 커지면 자연스레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이 형성되는 법. 당시 호주 각 주에서 사회적으로 지배층에 있던 이들이 자연스레 그들의 기득권 구축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할 무렵, 호주를 하나의 연방국가(Federation)로 묶고자 하는 결정적 계기가 발생한다.

1889년 영국정부는 에드워드(J. B. Edwards)라는 해군 장군에게, “장군! 당신이 가서 오합지졸 호주군대 상태가 어떤지 좀 살펴보시요!”라고 명령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영국정부가 염려했던 것은 만일 외부세력이 호주를 침공할 경우 영국 본토와의 거리가 워낙 멀어 손길이 닿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이는 “남주기에는 아까운 넓은 식민지 한곳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의미였다. 영국정부의 명령으로 호주군대를 살펴본 에드워드 장군의 보고서 결론은 이랬다. “만일의 경우, 우리 영국병사들을 여기에 파견하느니 차라리 캥거루를 훈련시키는 것이 낫다.”

에드워드 장군의 보고서가 알려지자, 드디어 호주 각 주에서 목소리가 가장 큰 ‘전국구급 정치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리곤 이렇게 외쳤다.

“우리가 남이가!”

이들 가운데 전국적으로 신망이 높았던 헨리 파크(Henry Parkes, 1815~1896)는 1890년 멜번에서 가진 ‘연방국가 결성을 위한 공청회’에서 이렇게 주창했다.

“호주시민으로서 영국의 일원이 돼서는 왜 안 되는가? 우리 스스로를 연합된 시민으로 만들고, 하나의 국가로서 세계 앞에 서자. 그리고 ‘고향’(영국을 지칭)으로 가는 꿈을 접자. 우리 호주는 우리 땅으로 우리의 집을 만들어야 한다.”(Why should not the name of an Australian citizen be equal to that of a Britain? Make yourselves a united people, appear before the world as one, and the dream of going ‘home’ would die away, We should have home within our sho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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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파크의 이 연설을 시작으로 호주는 “호주의 연방국가 독립”을 위한 공론이 들끓기 시작됐다. 그때 호주의 독립을 주장하는 근거에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은, 호주의 내셔널리즘이었다. 1800년대부터 점차 호주 땅에서 태어난 ‘호주산 백인’들의 인구가 점차 많아지는데, 이들이 가진 생각은 영국에서 태어난 그들 부모 세대와는 다른 것이었다. “영국이 우리 고향? 그건 우리 엄마아빠 생각이고…,”

두번째 이유는, 전술하였다시피 호주의 국방력이었다. 그 당시, 호주의 주정부마다 독립적인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주정부 수입에 비해 유지 효과는 미미하였다. 게다가 에드워드 장군의 보고서 결과대로, 외부세력으로부터 침공이 있을 시 한 국가를 방어할 만한 총체적인 군사 지휘권 발휘가 문제였다. “만일의 사태에 누가 호주군 총사령관이 될 것인가? 전쟁 나면 상의해 보자?”

세번째 이유로, 각 주간 교통수단의 표준화였다. 그 당시 각 주는 자치적인 경계선을 가지고 있었는데, 주를 관통하는 기차를 타는 승객들은 주 경계선에서 기차를 갈아타야만 헀다. 주 사이의 무역거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런 이유들 못지않게, 호주산 백인들 특히 노동자 계층이 가장 염려했던 것은 타민족 출신 이민자들로 인한 노동시장 잠식이었다. 결국 이들의 우려는 훗날 백호주의(White Australia)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의 이런 내외부적 정치역학 요인들 때문에 각 주에서 호주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움직임이 태동한다. 그러나 정작 각 주를 대표하는 헌법제정위원(delegates)들이 선임된 이후 일반인들의 민심을 살펴본 결과, 헨리 파크경(Sir Henry Parkes)이 이야기한 것과는 반대로, 그들은 (영국과) 진홍빛 실로 엮어진 혈연관계(the crimson thread of kinship)를 굳건히 지키려는 충성스런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헌법제정위원들은 당시 이미 영국과 독립된 국가를 형성한 미국뿐 아니라, 캐나다, 스위스의 헌법안을 검토하였지만, 호주헌법의 기본초안은 영국 웨스터민스터(Westerminster) 의회구조를 근간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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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헌법의 생성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의회구조가 생겨난 역사적 배경을 잠시 살펴보자. 여기에는 영국왕실과 각 지방 성주들로 구성된 의회간의 오랜 정치적 투쟁이 있었다. 영국이 야만인 생활과도 다름없었던 중세시절을 거친 후, 1649년 당시 왕이던 챨스 1세가 그 유명한 올리버 크롬웰(1599~1658)의 공화정치에 의해 밀려난다.

수년 후, 크롬웰이 죽자 다시 왕실의 찰스 2세가 군주제(monarchy)를 회복하는데 이때부터 캐톨릭(Catholic)을 주장하는 왕과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를 주장하는 의회가 다시 종교문제로 내전까지 치룬다. 1689년 의회가 승리하여 권리장전(Bill of Right)을 통과시킨다. 그리고 다시 왕을 의회 아래로 복속시켰다. 이것을 찰스 2세의 어머니 퀸 메리(Queen Mary)가 동의한다. 이때부터 ‘웨스터민스터 의회 정치구조’라는 개념이 생겨나고 법적인 구속력을 갖게 된다.

그후 영국의회와 왕은 서로의 권력을 나누어 갖기 위해 상호공생의 길을 모색한다. 즉 지역유지(head of states)들은 왕의 군주제를 인정하고 왕 또한 지역유지들의 영업권(?)을 인정하여 양측은 법안제정 등과 같은 큰일(통치권력)은 의회에서 통과되도록 하는 절차를 만든다. 이때부터 권력분립(separation of powers)이 시작되고 영국의 왕은 이에 대해 명목상의 견제장치를 만든다. 영국의 입헌군주제(Constitutional Monarchy)의 시작이다.

입헌군주제가 시작된 영국본토와 달리 당시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벗어나고자, 미국은 영국과의 독립전쟁(1775~1783)에서 승리하여 영국본토와는 다른 독자적 헌법을 갖게 됐다. 미국 내에서 지역유지들의 영업권을(?) 인정하는 토마스 제퍼슨이 기초한 연방주의헌법이 바로 그것이다. 1850년대 이후부터 호주의 헌법제정을 위한 주요 정치인들은 미국이 가진 연방주의헌법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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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그때부터 미국과 문화 교류가 시작된 호주는 미국이 주창하는 연방주의(Federalism)에도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지역유지들이 보기에 연방주의는 각 주에서 그들이 이미 구축한 기득권 유지에 좋은 정책으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미국 내에서 크게 인기를 끈 프랑스 작가 알렉스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1805~1859)이 쓴 <미국의 민주주의>(Democracy in America)라는 책이 발간과 동시에 재판 1쇄를 찍자 영국 작가 제임스 브라이스(James Bryce, 1838~1922)가 1888년 <미국의 연방주의>(American Commonwealth)를 발간하여 당시 호주의 정치인 알프레드 디킨(Alfred Deakin, 1856~1919)이 1890년 영국 런던에서 브라이스를 만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난 당신 제목이 더 맘에 들어요. 아무래도 우리 호주는 ‘영국과의 추억’을 상기시켜 주는 ‘Commonwelath’라는 제목이 더 맘에 와닿는 것 같소” 라고 했다.

영국에서 돌아온 알프레드 디킨은 그때부터 영국 의회제도와 미국의 상원(Senate)과 같은, 각 지역유지들의 입지를 굳혀주는 몇가지 미국헌법 조항 등을 가미하여 1900년 최초의 호주헌법 초안을 들고 영국의회로 가서 “싸인해주세요!”라고 했다. 영국과의 정치문화적인 혈연관계를 기본으로 하면서 미국과 같이 영국본토와는 독자적인 독립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멜번 지역유지들과 시드니 지역유지들이 공동합의하여 각자의 주에서 100마일 떨어진, 오늘날의 켄버라(Canberra)에 호주 최초의 수도를 만든다. 이윽고 1901년 호주는 독립을 선포한다.

 

 

 

장영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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