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100년] ‘십상’으로 본 원불교 창시 소태산 부처님의 생애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5월1일(일) 오후 2시,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전세계 원불교 교도들이 모여 ‘원불교 100년 기념대회’를 펼친다. ‘원불교 100년 기념대회’를 앞두고 이상기 <아시아엔> 발행인 등 많은 분들이 원불교를 창시하신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 1891~1943) 부처님에 대해서 알려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그래서 원불교를 처음 만나신 분들께 소태산 부처님의 일대기를 쉽게 전하기 위해 그 웅대한 일생을 유년시절 발심에서부터 열반에 드시기까지 ‘열 가지 모습(十相)’으로 나누어서 알려드리려 한다. 일찍이 소설가 남지심(南智心)님께서는 원불교 소태산 부처님을 ‘담무갈(曇武竭)’로 표현한 바 있다. ‘담무갈’은 <화엄경>에서 “금강산 일만이천봉에 상주하며 법을 일으킨다”고 전하는 법기보살(法起菩薩)의 다른 명호(名號)다.
소태산 부처님께서는 1891년 5월 5일 전라남도 영광에서 태어나셨다. 소태산 부처님께서는 7세부터 자연현상과 인생에 대하여 특별한 의심을 품었다. 그리고 스스로 도(道)에 발심하여 20여년 간 구도고행을 계속했다. 마침내 1916년 4월 28일, 큰 깨달음을 이루셨다. 소태산 부처님은 대각(大覺) 후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를 주창했다.
소태산 부처님께서 대각 후 제일 먼저 하신 일이 아홉 분의 제자들을 데리고 새 회상(會上) 창립의 경제적 기초를 세운 2만6천여평의 정관평(正觀坪) 방언공사(防堰工事)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연이어 인류구원을 위한 혈성(血誠)의 기도로 법인성사(法認聖事)를 이룩했다.
그리고 ‘법신불(法身佛) 일원상(一圓相)’을 최고의 종지(宗旨)로 삼아 교리와 제도를 제정했다. 또한 교화, 교육 자선의 중심지 익산 총부건설 등으로 원불교의 문을 연 것이다. 소태산 부처님의 제세경륜(濟世經綸)은 인류의 빛이요, 거룩한 주세성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태산 부처님의 일대기는 ‘십상’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이는 원불교 창립의 큰 물줄기이며 원불교 초기 교단 사(敎團史)이기도 하다.
첫째, 관천기의상(觀天起疑相)이다. 7세 경부터 우주 만유의 온갖 이치와 인간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 스스로 큰 의심을 일으키어 깊은 사색에 잠기게 된다.
둘째, 삼령기원상(蔘嶺祈願相)이다. 11세 되던 해 문중의 시향제에 참석했다가 신통(神通) 불가사의한 힘을 가졌다는 산신(山神)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 말을 듣고 산신을 찾아 모든 의심을 해결하리라는 희망을 품고 ‘삼밭 재 마당바위’를 오르내리면서 5년간이나 기도치성을 계속한다.
셋째, 구사고행상(求師苦行相)이다. 16세 되던 해 봄에 고대소설〈조웅전(趙雄傳)>을 만난다. 주인공이 도사(道師)를 만나 신통 묘술을 배워 크게 성공하고 모든 소원을 다 이루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때부터 산신 만나기를 단념하고 보통 인간과 똑같은 형상을 가졌다는 도사를 만나 모든 의심을 해결해 보리라는 결심으로 스승을 찾아 온갖 고행을 거듭한다.
넷째, 강변입정상(江邊入定相)이다. 20세가 넘자 산신과 도사는 이야기 속에서나 등장하는 가공적인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 이때부터 “내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 하는 큰 걱정만 날로 쌓이게 되었다. 그리고 우연히 떠오르는 주문(呪文)을 외우기도 하고 때로는 장승처럼 우두커니 한곳에 서서 깊은 명상에 빠져들게 된다.
다섯째, 장항대각상(獐項大覺相)이다. 26세 되던 1916년 4월28일 새벽, 노루목(獐項) 동쪽 하늘이 밝아오는 것을 보고 문득 마음이 밝아지고 모든 의심이 일시에 다 풀리며 마침내 일원의 진리를 크게 깨친다.
여섯째, 영산방언상(靈山防堰相)이다. 대각을 한 후, 영산에서 최초로 구인제자를 얻어 먼저 저축조합을 설치했다. 그리고 미신타파·허례폐지·근검저축·절약절식·공동출역 등으로 새 생활운동을 전개했다. 1918년(원기 3) 4월부터는 1년간 구인제자들과 함께 영산 앞의 갯벌을 막아서 간석지 개간사업을 전개하고 그 이름을 ‘정관평’이라 지었다.
일곱째, 혈인법인상(血印法認相)이다. 방언공사가 끝나자 이어서 구인제자로 하여금 마음을 통일시키고 공도정신을 살리기 위해 진리 앞에 사무여한(死無餘恨)의 기도 서원을 올리게 한다. 그리고 마침내 1919년(원기 4) 8월 21일에 백지혈인(白指血認)의 이적(異蹟)이 나타나 새 회상창립의 법계인증을 얻게 된다.
여덟째, 봉래제법상(蓬萊制法相)이다. 혈인기도를 끝낸 다음 그 해 10월 전북 부안 봉래정사로 들어간다. 그리고 몇몇 제자들과 함께 수양과 보임(保任)에 주력했다. 한편으로는 창립인연들을 만나시고 일원상·사은사요·삼학 팔 조를 중심으로 한 교리의 강령과 초기 교서(敎書)를 제정했다.
아홉째, 신룡전법상(新龍傳法相)이다. 마침내 기회가 무르익자 1924년(원기 9) 6월1일 익산시 보광사에서 불법연구회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교문(敎門)을 공개하게 되었다. 이어 전북 익산군 북일면 신룡리에 총부기지를 정한다. 이로부터 제생의세의 교화사업을 펴기 시작했다.
열째, 계미열반상(癸未涅槃相)이다. 일제의 압정 속에서 교단을 창립 발전시켜 오다가 일제의 핍박이 너무 심해 1943년(원기 28) 계미년 6월 1일 53세를 일기로 거연히 열반상을 나토셨다.
원불교라는 이 새로운 불교가 100년 만에 한국 4대종교의 반열에 우뚝 섰다. 이제는 우리나라의 종교가 전 세계로 널리 널리 퍼져가고 있다. 소태산 부처님은 서당공부 2년밖에 하지 않은 평범 속의 비범한 성자다. 그 위대한 생애를 내 볼품없는 글이나 재주로는 다 그리지 못한다. 이 소태산 부처님의 십상으로 부족하지만 ‘원불교 100년 성업’을 더듬고 함께 마음을 합해 주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