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100년] 부처님·불교 알려면 ‘삼법인’ 공부로 시작하세요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새달이다. 이달 말부터 내달초 서울시청 앞과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는 원불교 100년 기념행사가 잇따라 열린다. 또 5월14일은 석가탄신일이다. 이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근본 깨달음에 대해 알아보면 많은 공부가 될 것이다.
먼저 삼법인(三法印) 공부다. 법인은 ‘법의 표지’ 또는 ‘불법(佛法)의 특징’을 뜻한다. 법인사상은 석가모니의 정각(正覺)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어느 불경이든 법인사상에 합치되면 이를 부처님의 진설(眞說)이라 인정한다. 법인사상에 어긋나면 바른 불설(佛說)이 아니라고 판정해 왔다.
삼법인은 ①제행무상(諸行無常) ②제법무아(諸法無我) ③열반적정(涅槃寂靜)이다. 이 3가지에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더하면 사법인이 된다. 대부분 경전에서 사법인을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열반(涅槃)의 순으로 열거하고 있다.
원시경전에는 일반적으로 삼법인 또는 사법인을 체계화시킨 설은 없다. 하지만 무상·고·무아에 관해서는 많은 경전에서 설하고 있다. 이를 유위(有爲)의 삼상(三相)이라고 도 부른다. 이 유위를 벗어남으로써 열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이 네 가지로 사법인의 교설(敎說)이 성립된다.
원시불교 이래 대승불교에 걸쳐 가장 중요한 게(偈)로서 무상게(無常偈)가 있다. 이를 범어(梵語) 원본대로 번역하면 “제행은 무상하여 생과 멸의 법이 있으며, 생하여 끝나서는 멸한다. 이들 제행의 적멸은 낙이다”(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己 寂滅爲樂)라고 했다.
중국 천태종 등의 일부 종파에서는 삼법인이 소승불교의 설이므로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는 일실상인(一實相印)으로써 법인을 삼는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제법실상을 십여시(十如是)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삼법인과 십여시에 의한 제법실상은 실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여 삼법인설이 보편적으로 유통되었다. 삼법인 각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제행무상이다. 제행(諸行)이란 생멸 변화하는 일체의 형상 법을 말한다. 유위와 같은 뜻이다. 모든 현상은 잠시도 정지하지 않고 생멸 변화하므로 제행무상이라 하는 것이다. 제행이 무상하다는 것은 눈앞의 사실로서 경험하고 있는 것이며, 특별한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법인 중에는 제행무상을 가장 앞에 두게 된 것이라고 한다.
무상하기 때문에 슬픈 일도 생기지만, 무상하기 때문에 불행을 행복으로 돌릴 수도 있다. 고뇌를 해소하고 불완전한 것을 완전한 것으로 이끄는 종교의 가르침이 설해지는 것도 제행무상이라는 기본적인 진리가 인정되기 때문이다. 이 무상의 체득을 위한 실천행법을 불교에서는 무상관(無常觀)이라고 한다.
무상관이 설해지는 의의는 첫째, 부모 형제나 이웃의 죽음에 의해 세상의 무상함을 느끼고 종교심을 일으키게 되기 때문이다. 부족함이 있을 때 자기반성을 하게 되고, 그 반성에 의해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바른 눈이 트이며, 자기와 세상과의 결합관계를 알게 됨으로써 종교심이 움튼다. 둘째, 무상을 생각함으로써 집착이나 교만심을 버리게 된다. 셋째, 무상관에 의해 시간을 아끼고 정진 노력하게 된다.
둘째, 제법무아다. 제법의 법은 무아성(無我性)을 뜻한다. 이 제법은 제행과 마찬가지로 현상으로서의 일체 법을 뜻한다. 무아는 ‘아(我)가 없다’, ‘아가 아니다’라는 뜻이며, 아란 생멸변화를 벗어난 영원불멸의 존재인 실체 또는 본체를 뜻한다. 실체와 본체는 경험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존재하는지 아닌지가 분명하지 않은 무기(無記)라 하여, 불교에서는 이를 문제 삼는 것을 금하고 있다.
셋째, 열반적정이다. 열반은 ‘불어 끄는 것’ 또는 ‘불어서 꺼져 있는 상태’라는 뜻이다. 번뇌의 불을 불어서 끄는 것이 열반적정이다. 불교의 이상(理想)이 곧 열반적정이다. 석가모니가 인생의 고(苦)를 불가피한 것으로 단정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종교적 안심(安心)의 세계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넷째, 일체개고다. 일체개고는 일체고행(一切苦行) 또는 제행개고(諸行皆苦)라고도 말한다. 일체의 현상법이 ‘고’임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모든 현상법이 무상하기 때문에 고라고 한 것이다.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의 명제는 부정할 수 없는 진리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일체개고의 명제는 무조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불교적인 사고방식에 의하면 삼계육도(三界六道)의 윤회(輪廻)와 미혹의 생활 자체가 고일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일체개고는 미혹한 범부에게만 해당되며, 미혹이 잔존하는 이상은 일체의 현상이 고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체개고를 법인(凡人)으로 설정한 까닭은 현실의 고와 무상과 부정 등을 관찰하여 현실의 고뇌를 벗어나서 안락한 이상의 경지를 얻게 하기 위한 것이다.
삼법인은 불교의 존재론적 기본입장과 인생관의 핵심을 아주 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모든 존재는 불변이 아니다. 그 원인은 모든 사물이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고, 이러한 진리를 모르는 데서 번뇌가 생기는 것이다. 진리를 깨달아 번뇌를 제거한 열반의 세계에 이르는 방법인 인생 최고의 가르침이 삼법인이다.
조금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불교를 알려면 이 삼법인부터 확실히 알지 않으면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이 근본사상에서 우주의 천만사리가 펼쳐진다. 제행이 무상하기 때문에 일체의 괴로움이 생긴다. 그 일체 고를 여의고 열반의 나라로 나아가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