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100년] 부처님이 녹야원서 처음 설법한 가르침이 ‘사성제’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불교에서 사성제(四聖諦)는 사제(四諦)라고도 한다. 사성제는 고(苦)·집(集)·멸(滅)·도(道)의 네 가지 진리로 구성되어 있다. 석가모니의 성도(成道) 후 자기 자신을 고찰하여 설한 것이 십이인연(十二因緣)이다.

그런데 사제 설은 이 인연 설을 알기 쉽게 타인에게 알리기 위해 체계를 세운 법문이다. 십이연기설이 이론적인 것임에 대해 사제 설은 이론적인 동시에 실천적인 것이며, 오히려 실천을 주로 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석가모니는 성도 후 좌선사유(坐禪思惟)에 의해 스스로의 깨침을 즐겼다. 그러나 인연의 이치가 매우 어려워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을 알고 설법 방법을 연구하여 사제 설을 고안했다. 석가모니가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비구(比丘)를 상대로 처음 설법한 것이 바로 이 사제의 가르침이다.

첫째는 고제(苦諦)다.

고제는 불완전하고 더러움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 현실을 바르게 보는 것이다. ‘고’는 구체적으로 생노병사의 4고(苦)와 원증회고(怨憎會苦)·애별리고(愛別離苦)·구부득고(求不得苦)·오온성고(五蘊盛苦)의 네 가지를 합한 8고로 하고 있다. 생로병사의 네가지 ‘고’야 타고난 고라 어찌할 수 없으나 나머지 네 가지 고는 우리의 수행으로 없앨 수 있는 고다. 그 뒷 사고(四苦)를 알아보자.

첫째 애별리고는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고 사별하는 고통이다.

둘째 원증회고는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사는 고통이다.

셋째 구부득고는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에 생기는 고통이다.

네째 오온성고는 오온(五蘊, 色 受 想 行 識)에 대한 자기중심적인 집착을 가진다면 모든 것이 고통이다.

집제(集諦)에 대해 살펴본다. 집이란 집기(集起), 즉 사물이 모여 일어나기 위한 원인을 말한다. 그러니까 ‘고’의 원인이나 이유라는 뜻이 된다. 고의 원인으로서 “도처에서 열락(悅樂)을 추구하여 그치지 않는 갈애(渴愛)”를 뜻하는데, 십이연기 설에서는 무명(無明)과 갈애를 고뇌의 원인으로 함께 본다.

그러나 갈애는 무명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므로 그 속에 무명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갈애는 모든 번뇌를 대표한다. 이 갈애는 욕애(欲愛)와 유애(有愛)와 무유애(無有愛)의 삼애(三愛)가 있다. 욕애는 감각적 욕구인 오욕(五欲)에 대한 갈애로서, 현실에 있어서의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애욕을 말한다. 유애는 존재를 뜻하는 유(有)에 대한 갈애로서, 사후에 천국 등의 훌륭한 곳에 태어나고 싶다는 욕구를 말한다.

이것도 자기중심적인 욕구이며, 천국 등도 윤회계(輪廻界)에 속하는 것이므로 이상(理想)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무유애의 무유는 비존재, 즉 허무를 말한다. 어떠한 존재도 절대 확실한 안온세계(安穩世界)가 아니기 때문에 꿈과 같이 아무 것도 없는 허무계(虛無界)를 안주(安住)의 땅으로 삼는 것을 무유애라 한다. 무유애 또한 자기중심적인 것이므로 이상으로 삼는 것을 금한다.

무아(無我)나 현세적 입장에서 볼 때 이 갈애는 번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괴로울 수밖에 없는 인간존재의 고통의 원인을 탐(貪)·진(瞋)·치(癡)의 삼독(三毒)으로 풀이하는 경우도 많다. 자기에게 맞으므로 탐욕을 일으키고, 맞지 않기 때문에 분노하며, 그것이 다시 갖가지 어리석음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괴로움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멸제(滅諦)를 보자.

멸제는 깨달음의 목표, 곧 이상향인 열반의 세계를 가리킨다. 즉 모든 번뇌를 대표하는 갈애를 남김없이 멸함으로써 청정무구한 해탈이 오는 것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도제(道諦)의 도는 이상향인 열반에 도달하는 원인으로서의 수행방법이다. 한 마디로 길을 이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팔정도(八正道)라는 여덟 가지 수행법을 제시하고 있다. 팔정도는 바르게 보고(正見), 바르게 생각하고(正思惟), 바르게 말하고(正語), 바르게 행동하고(正業), 바른 수단으로 목숨을 유지하고(正命), 바르게 노력하고(正精進), 바른 신념을 가지며(正念), 바르게 마음을 안정시키는(正定) 수행법이다.

이는 또 유(有)에도 무(無)에도 집착하지 않는 중도(中道)의 수행법이다. 사제 중의 고는 생사과(生死果)이고, 집은 생사인(生死因)이며, 멸은 열반과(涅槃果)라 할 수 있다. 이는 다시 유전연기(流轉緣起)와 환멸열기(還滅緣起)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 두 가지는 생사유전의 고통과 그 원인을 말한다. 또한 멸과 도의 두 가지는 유전을 벗어나 무고안온(無故安穩)의 열반과에 도달할 수 있는 환멸의 수행법을 말한다.

그러나 학자 중에는 성문(聲聞, 佛弟子)이 고집하는 사제의 견해를 파(破)하기 위하여 일체의 제법(諸法)이 공적(空寂)하다는 입장에서 볼 때 고·집·멸·도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집착을 깨뜨려서 사제의 진의(眞意)를 살리기 위함이다.

또한 선가(禪家)에서는 사제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을 가하고 있다. 선가에 의하면 고제는 한 생각 물든 마음이 생기는 것을 뜻하고, 집제는 그 생각이 거듭 이어지는 것을 뜻하며,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멸제라 하고, 멸이 멸하지 않음을 철저히 아는 것을 도제라고 하였다. 즉 사제를 모두 한 생각에 둔 것이다.

12연기에 의해 생긴 모든 고통은 그 원인(集)을 찾아 치료하면 없어진다는 것(滅)이다. 그러니까 고의 원인을 찾아 고를 멸하는 방법(道)이 바로 이 사성제다. 불교의 근본 교리를 알고 공부하고 수행해 가면 우리는 훨씬 속 깊은 공부와 수행을 통해 저 언덕(彼岸)에 도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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