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만에 언론인 면담 박근혜 대통령께 ‘겸공구익'(謙恭求益)을 당부함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나는 2012년 대통령 선거 때 박근혜 대통령을 찍었다. 모든 국민을 감싸 안는 부드럽고 섬세한 모성애의 정치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4.13 총선에서 박 대통령의 새누리가 참패한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나의 기대가 산산이 조각난 정치를 어떻게 신뢰의 정치로 돌릴 수 있을까?
<서경>의 ‘상서고훈(尙書古訓) 요전(堯典)’에는 이제삼왕(二帝三王, 堯·舜·禹·湯·文武)이 천하를 통치했던 대경(大經)·대법(大法)이 담겨 있다. 바로 천하를 다스리는 정치철학이 그 책 속에 들어 있다.
정치가 어렵긴 어려운 모양이다. 요순과 3왕의 정치 이래로 끝내 요순정치는 이뤄졌던 일이 없다. 왜 요순정치가 실현될 수 없었던가? ‘요전’에 이런 말이 나온다.
“순임금은 고요(皐陶)라는 신하를 왕사(王師)나 천자의 자리를 물려줄 신하로 여기지 않았으면서도 좋은 정책을 건의하면 절하고 받아드리면서 천자로서의 존귀함을 나타내지 않았다. 성인 제왕이 겸공(謙恭)한 태도로 보탬이 될 일을 구하던 모습이 그와 같았다.
그러나 진(秦)나라 이후로는 전적으로 군주는 높고 신하는 낮다(尊主卑臣)는 이론을 통치하는 가장 좋은 정책으로 여겼기 때문에 군주의 위세는 높아가고 벼슬아치들은 날로 낮아져서 이제삼왕(二帝三王)의 통치는 다시 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제왕이나 통치자라면 백성들을 상전으로 여겨야 한다. 그리고 모든 신하들을 함께 일하는 정치가로 여겨, 겸손하고 공손한 자세로 좋은 정책의 건의는 절하면서 받아드려야 한다. 하지만 진시황 시절부터 자신만 존귀하고 신하들이나 백성들을 얕잡아보면서 독선과 오만으로만 정치를 이끌어왔기 때문에 요순시대는 다시 오지 못하고 만 것이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이 제시한 요순시대의 통치원리가 ‘겸공구익(謙恭求益)’이다. 제왕이나 군주는 겸손하고 공손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도움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지 못하면 만 가지 일이 무너져 내리고 만다.
<서경>에 “통치자가 밝고 신하들이 어질면 모든 일이 편안해진다. 통치자가 사소한 일들이나 챙기면 신하들은 게을러지고, 만 가지 일들이 무너져버린다”(元首明哉 股肱良哉 庶事康哉 元首叢?哉 股肱惰哉 萬事墮哉)고 했습니다.
오만과 독선으로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누가 뭐래도 이 나라의 대통령이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을 다 품에 안아야 한다. 통치자가 해야 할 일은 겸손과 공경이다. 모든 국민과 여야를 막론하고 좋은 제안이 나오면 절하고 받아들이는 일만 해주면 이 나라의 정치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겸공(謙恭)은 자기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높이는 것이다.
<잡보장경>(雜寶藏經)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한 장자(長者)가 자신의 아들이 다섯살쯤 되자 관상쟁이를 불러 상을 보게 했다. 관상쟁이는 아들의 상을 보고 말했다. “아드님은 여러 복을 두루 갖췄습니다만 오래 살 운명은 아닙니다.”
?날벼락을 맞은 듯한 장자는 부처님 당시 중부 인도에서 세력이 가장 컸던 여섯 사상가인 ‘육사외도(六師外道)’를 찾아가 아들의 장수할 방법을 물었다. 하지만 한결같이 그 같은 방법은 없다며 도리어 화를 냈다. 이윽고 장자는 부처님을 찾아갔다. “아들의 관상을 보니 명이 짧다고 합니다. 원컨대 부처님께서 제 아들의 명을 늘려주시기 바랍니다.”
“인명을 마음대로 늘릴 수 있는 그런 방법은 없느니라.” “하지만 부처님이시여, 어찌 부모된 자로 아들이 먼저 죽는 것을 보겠습니까? 부디 저희 부자를 가엾게 여기시어 방편의 가르침이라도 주십시오.”
“정 그렇다면 아들과 함께 성문 앞으로 가서 지나가는 모든 이들에게 정성으로 절을 하도록 하라.”
어느 날 죽음의 신이 바라문의 모습으로 변하여 성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장자와 아들은 그를 향해 정성껏 절을 올렸다. 그러자 죽음의 신이 축원했다. “내가 너를 장수하게 하리라.” 그 죽음의 신이 바로 그날 장자의 아들을 데리고 갈 명부사자(冥府使者)였다. 그러나 이미 장수를 축원했으므로 아들을 데려갈 수 없었던 것이다.
장자의 아들은 이렇게 모든 이들에게 겸손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절을 한 결과 목숨을 연장받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이 겸공은 죽을 자의 목숨도 살려준다. 겸손과 공경 속엔 무한한 능력이 담겨져 있다. 나라를 잘 다스리려는 사람이라면 어찌 겸손과 공경을 즐겨 실천하지 않겠는가?
절이야말로 겸손과 공경을 익히는 가장 확실하며 손쉬운 방법이다. 본래 절의 의미는 전체(근본) 자리에 나를 내던져서 성인과 하나가되는 의미와 성인을 공경하는 의미가 들어 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 하심의 의미도 있다. 이처럼 겸손과 공경은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예의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일 줄 아는 이야말로 진정 자신을 높일 줄 아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