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국회의원 후보님, ‘공부와 수행’ 절대 게을리 하지 마세요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요즈음 백수로 지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면서 하는 일이 없어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고 고민한다. 그런데도 공부와 수행을 하자고 하면 대부분 바쁘다고 한다.
도대체 부족하면 찾아서 내 것으로 만들면 좋으련만. 심심하고 지루하다고 하는 것은 공부할 줄 모른다는 의미다. 공부라는 것은 뜻 그대로 노력한다는 말이다.
공부를 통해서 여러 가지 가능성이 열린다. 공부는 첫째 학습이다. 학습이라는 말은 <논어> 첫머리에 “학이시습지면(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라고 나온다. “배우고 항상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뜻이다.
공부는 다른 사람이 해놓은 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다른 사람의 것을 내가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미 있는 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면 배우지 않고서는 안 된다. 그래서 배운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수 천년 노력해서 깨친 것을 배우면 금방 활용할 수 있지만 배우지 않으면 그림의 떡이다.
습(習)에 대해서는 ‘조삭비왈(鳥數飛曰) 습(習)’이라 하였다. 새가 날개가 돋았을 때 처음부터 잘 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연습을 하고 또 해야 비로소 날 수 있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같이 학습이 깊거나 넓지 못하면 절대 인재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학교에서 하거나 사회에서 배우는 것만 공부로 여긴다.
우주의 진리를 담은 경전도 학습해야 알게 되고, 역사도 기술도 학습해야 알게 된다. 인생의 도를 알려고 해도 학습을 통하지 않고서는 깨칠 수가 없다. 어떤 이가 큰스님께 찾아가 여쭙기를 “금강경이 영험이 있다고 하는데 어떤 영험이 있습니까?” 하였다. 큰스님께서는 “영험이 없다”고 하셨다. 그러자 왜 없는지를 다시 여쭈었다. “금강경을 읽지도 않고 보지도 않고 외지도 않고 저 높은 서가에만 올려다 놓기만 하면 영험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수행은 공부와 달리 안으로 자기의 마음을 비춰보는 것이다. 또 관(觀)에 대해서 금강경에서는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이라”(응당 이와 같이 보아라. 모든 세상 사물이 과거는 다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고 물거품과 같고 생각은 그림자와 같고 우리의 몸은 이슬과 같고 현재 사는 것은 번개와 같다)고 했다.
이렇게 인연법(因緣法)으로 생겼다 사라지는 것을 살펴보면 오는 곳이 없고, 가는 곳도 없다. 이것을 보는 것이 바로 관조이고 수행이다. 이렇게 무량겁(無量劫)의 세월을 관조해 보면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다. 이걸 불생불멸(不滅)이라 한다.
불생불멸을 넓게 관찰하는 것이 관조이고 수행이다. 마치 바다에서 파도가 계속 생기지만 생기는 것이 없는 것과 같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이렇게 넓게 관찰하면 도대체가 걱정근심 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관조를 하면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훤히 알게 된다.
사람들이 한 순간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서 인생을 망치는 경우가 많다. 모든 것을 억눌러서 참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참다 보면 여러 가지 병이 더 깊어진다. 감정이 일어나면 원인을 깨달아서 살피는 것이 좋다. 이것을 각조(覺照)라고 한다. 섭섭한 마음이 들면 “내가 지금 섭섭한 마음을 일으키고 있구나” 하고 비추어 보는 것이다.
섭섭한 마음을 느끼는 것이 각(覺)이고, 그 마음을 비추어 보는 것이 조(照)다. 그러고 나면 그 섭섭한 마음이 사라지고 섭섭해 하는 이유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예전부터 알던 사람을 찾아갔는데 잘 대해주리라 생각했건만 잘 대해주지 않아서 서운했을 경우가 있다. 그 서운한 마음이 든 이유는 잘 대해주기를 바라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분노는 욕심으로부터 비롯된다. 기대하는 마음이 없으면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다. 기대 때문에 분노가 일어나는 것이다. 자기 욕심으로 자기가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 마음을 자기가 돌아보고 챙기는 것이 바로 각조공부다.
이런 각조공부를 계속하면 분노의 원인을 알게 되고, 더 공부하면 화가 나려고 할 때 알게 된다. 화는 알고 나면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빨리 알아서 빨리 사라지게 하는 것이 행복이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전혀 화를 안내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실제로는 빨리 마음을 챙기는 것일 뿐이다.
수행은 우리의 마음을 요란하지 않게, 어리적지 않게, 그르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정신 수양’ ‘사리의 연구’ ‘작업의 취사’라 하고 이를 일러 삼학(三學)이라 한다. 삼학을 닦은 힘이 삼대력(三大力)이다. 삼대력이 최고의 경지에 오른 분이 부처이고 보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