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아집 벗고 중도·대의로 나오시오”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요즈음 사람 몇 명만 모여도 의견이 두 쪽으로 갈려 한 쪽에선 또 한편을 반동이니 수구꼴통이니 하고 언성을 높인다. 왜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것일까? 모두가 중도(中道)를 마다하고 오해와 편견이 판을 치고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불교 대산(大山) 종사님 법문 중에 “야야 몰라서 그랬을 것이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니 너무 나무라지 말거라”라는 말씀이 있다. 이와 같이 서로 입장을 바꿔보는 것이다. 정치, 사회, 종교, 이웃, 가족, 친구간의 여러 문제들을 솔직한 대화와 이해, 배려로 풀어간다면 갈등이나 원망은 없을 것이다.

네 편이나 내 편, 선과 악으로 구분지어 편을 가르거나 판단하지 말고, 사랑으로 어려움을 해결해 나가면 좋겠다. 방법은 다르지만, 모든 사람들이 세상을 유익하게 만드는 동척사업을 펼치는 것이다. 완벽하게 착한 사람도, 절대적으로 악한 사람도 없다. 다 능선능악(能善能惡)이다.

필리핀에서 사업을 하는 한국인 동료 세 명이 한 집에서 살았다. 이들이 필리핀인 가정부를 두었다. 가정부는 청소와 요리도 잘 해주었고, 그녀가 해주는 일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런데 선반에 보관해놓은 술병의 술이 조금씩 줄어든다는 걸 눈치챘다. 가정부가 몰래 홀짝홀짝 마시는 것이 아닌가 의심을 했다.

이들은 자기 전에 한잔 더 할 생각을 하다가 술병에서 술이 자꾸 줄어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취기가 좀 돈 상태라 그들은 가정부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술이 남은 병 안에 오줌을 눠서 채워넣었다. 그걸 선반 위에 도로 갖다 놓고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았다.

며칠이 지났는데 술병 속의 술이 여전히 줄어들고 있었다. 그들은 미안 했던지 가정부에게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 그래서 가정부에게 자기들 술을 마셨냐고 물었다. “네? 전 마시지 않았습니다. 요리할 때 자주 사용했는데요.”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 있다면 서로간 대화를 통해서 풀면 이런 낭패를 당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편견’을 가지고 판단한 결과다. 이와 같이 ‘오해와 편견’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가져다주었는지를 우리는 되돌아봐야 한다.

석가모니는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깨달음을 얻었다. 석가모니는 부처가 될 때까지 6년 동안 대부분 가혹한 고행(苦行)의 도를 닦았다. 그러나 그 고행도 몸을 괴롭게 하는 것일 뿐 참된 인생문제의 해결책은 될 수 없었다. 출가 전의 왕자로서 물질적으로 풍족하여 즐거움에 찬 생활을 보냈다. 그러나 그러한 물질적 풍족함만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석가모니는 출가 전의 낙행(樂行)도 출가 후의 고행도 모두 한편에 치우친 극단이라고 생각하신 것이다.

불교나 원불교의 근본 사상은 중도다.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소태산(少太山) 부처님께서는 대각(大覺) 뒤에 혼자만 이 좋은 법을 알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 법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좋은 법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여 그들도 함께 깨닫고 자신과 같이 자유자재한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신 것이다.

중도! 이것이 불교나 원불교의 근본사상이다. 부처님께서 “중도를 대각하였다”고 선언한 것은 바로 그 모든 양 극단을 버렸다는 말씀이다. 곧 나고 죽는 것도 버리고, 있고 없는 것도 버리고, 약하고 착한 것도 버리고, 옳고 그른 것도 모두 버려야 한다.

모두 버리면 시(是)도 아니고 비(非)도 아니고, 선(善)도 아니고 악(惡)도 아니고,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닌 절대의 세계가 열린다. 이렇듯 상대의 모순을 모두 버리고 절대의 세계를 성취하는 것이 바로 해탈이며 대자유이며 성불이다.

모든 대립 가운데에서도 유와 무가 가장 큰 대립이다. 중도는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다. 곧 있음과 없음을 모두 떠난 것이 중도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유와 무가 살아난다. ‘유는 무로 무는 유로 돌고 돌아 지극하면 유와 무가 구공(俱空)이나 구공 역시 구족(具足)’인 것이다. 즉, ‘유무가 합하는 까닭에 중도라 이름하는 것’이다.

유와 무를 완전히 버리면 그와 동시에 유와 무가 서로 통하는 세계, 곧 원융회통(圓融會通)한 세계가 벌어진다. 중도의 세계란 유무의 상대를 버리는 동시에 그 상대가 융합하는 세계를 말한다. 양변을 버리는 동시에 양변을 융합하는 이 중도의 세계가 바로 불교와 원불교의 근본사상이다.

중도의 세계를 구현하는 곳이 바로 ‘덕화만발 카페’다. 그중도의 정신으로 내건 사대강령(四大綱領)을 소개한다.

하나. 우리는 맑고, 밝고, 훈훈한 낙원세상을 지향한다.

하나. 우리는 편협한 종교, 이념, 정치를 배격하고 중도를 지향한다.

하나. 우리는 서로 돕고 이끄는 상생상화의 정신을 지향한다.

하나. 우리는 매사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정열적으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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