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권의 훈훈한 세상] 곡차 좋아한 진묵대사 “구름을 병풍 삼고 바다를 술통 삼아”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우리는 살아가며 혈연, 지연, 학연은 물론 사상, 이념, 법연(法緣) 등 수도 없이 많은 속박 속에 산다. 이 속박을 여의고 활달자재(豁達自在)하게 살아갈 수는 없을까?

큰 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 있다. 우리는 큰 사람을 대인(大人)이라고 하고 작은 사람은 소인(小人)이라고 한다. 소인은 도량이 좁고 덕이 없으며 간사하며 수양이 얕고 품성이 거칠다. 또한 자기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는 사람을 소인이라 부른다.

대인은 우주의 진리를 깨친 불보살을 말한다. 불보살은 깨달음의 경지가 이 우주보다도 더 크다. 그리고 마음이 넓고 도량이 커 활달자재하다. 또한 지혜가 밝고 학덕이 높은 대인군자로 말과 행실이 바르고 인격과 덕행이 뛰어나 세상만사에 걸림이 없다.

세상에 그렇게 산 사람이 꽤 있다. 그런 도인 중의 한 분이 진묵(震?, 1562~1633) 대사다. 진묵대사에게는 온갖 일화가 많다. 그릇이 얼마나 큰 지 모를 정도로 걸출한 선승이었다. 오죽하면 진묵을 석가모니부처님의 후신(後身)으로 일컬었다. 신통력도 대단했다.

활달자재 한 모습을 진묵대사는 이렇게 읊었다.

‘슬그머니 일어나 춤을 추니’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자리 삼고/ 산을 베개 삼고/ 달을 촛불 삼고/ 구름을 병풍 삼고/ 바다를 술통 삼아/ 크게 취하여/ 슬그머니 일어나 춤을 추니/ 도리어 긴 소맷자락이/ 곤륜산에 걸릴까 걱정되노라.”(天衾地席山爲枕 月燭雲屛海作樽 大醉居然仍起舞 却嫌長袖掛崑崙)

도무지 겁도 없고 걸릴 것도 없다. 속박을 여읜 활달자재 그 자체다. 진묵대사는 그렇게 살았다. 그의 마음이 얼마나 크면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자리 삼고 산을 베개 삼아 잠을 잘까? 그에게는 따로 집이 있을 리 없다. 대사는 평소에 곡차(穀茶)도 매우 좋아했다.

스님의 술자리에는 달이 촛불이 되고 구름이 병풍이 바다는 그의 술동이가 되었다. 한껏 마시고 대취하면 슬며시 일어나서 덩실덩실 춤을 춘다. 행여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하늘을 날며 춤을 추는 옷자락이 저 높은 곤륜산에 걸릴까 하는 것이다. 그토록 큰 그릇인데도 마음에 염려가 되는 진묵 스님의 곤륜산은 무엇이었을까?

선심(禪心)은 그냥 툭 터지기만 한 것이 아니다. 때로는 한 점 여린 마음에 잠 못 이루는 밤이 있는 것이 또한 선자(禪者)의 선자다운 매력이기도 하다. 비슷한 말로 무애자재(無碍自在)라는 말이 있다. 이 역시 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하는 말이다. 무애(無碍)는 <화엄경>에 나오는 용어다.

무애자재란 장애가 없고 거침없는 정신세계를 표현한 말이다. 불가(佛家)에서는 ‘깨달음의 경지’나 ‘도인의 삶’을 말할 때 ‘무애자재’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깨달음의 경지란 매사에 걸림이 없고 자유롭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는 제멋대로의 언행은 결코 무애행이 아니다.

무애자재라는 표현에 가장 적합한 경우는 석가모니부처님과 소태산부처님의 삶이 될 것이다. 부처님 성불 이후의 삶을 따라가 보면 당신의 고집으로 인한 투쟁이 전혀 없다. 부처님께서는 절대평화의 열반(涅槃)을 체득하셨고, 그 열반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셨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모두가 그 길을 깨닫고 행복해지길 바라셨다. 그렇기 때문에 수십년 간 쉼 없이 중생제도의 길을 걸으셨던 것이다.

이것은 곧 다양한 계층의 엄청난 사람과의 만남을 뜻한다. 결코 당신의 추종자만을 만난 것이 아니다. 부처님 당시의 인도는 100가지가 넘는 사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상들은 거의 종교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5년 긴 여정에서 살상이 일어날 정도의 심각한 대립이 없다.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독단적이거나 타인을 무시하는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 삶에는 자기중심적이거나 자기만을 위한 것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나 걸릴 것이 없고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타인에 대한 배려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막된 언행을 하면서도 자신은 그것을 무애행이라고 떠벌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무애행이라고 강변을 하는 자체가 이미 많은 것들에 걸리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기에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따르게 되고, 피해를 당한 사람들은 당하고만 있으려 하질 않는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는 무애자재의 인물로 관자재보살을 등장시켜서, 무애자재에 이르는 길을 이렇게 설명한다.

“걸림 없고 자유로운 삶을 살고자 한다면, 우리의 몸과 정신작용이 공(空)한 것임을 밝게 봐야 한다. 공의 이치를 터득하면 죽음에 대한 공포도 사라지고, 삶에 대한 우아함과 추함의 분별도 사라지며, 재산 등의 많고 적음에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학문과 종교적 지식의 틀에도 매이지 않게 되고, 늘 깨어 있어 자유로울 수 있다. 이 경지가 되면 마음에는 아무것도 걸릴 것이 없고 두려움도 없으며, 눈앞의 경계를 거꾸로 잘못 판단할 일도 없어서, 마침내 항상 평화로울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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