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의 재밌는 철학] 철학은 ‘시대정신’을 파악하는 학문

자기 스스로 포착할 수 있도록 독립적 사유 활동력 발휘해야

탈레스를 최초의 철학자라고 부르는 것에 러셀이 불만을 느낀 이유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철학관과 달랐기 때문이다. 이 말은 러셀이 파악한 그 시대의 근본 문제가 탈레스의 그것과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하겠다. 헤겔이 말한 대로 철학은 ‘그 시대를 개념으로 포착한 것’ 즉 시대정신(Zeitgeist)을 파악하는 것인데, 각자가 파악한 시대정신이 달랐던 것이다. 파악된 시대정신에 따라 그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내용이 결정되고, 또 그 내용을 구현하는 방법론이 달라질 것이다.

철학에는 다른 내용과 다른 방법론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매우 당연하지만, 각 철학자들에게는 그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 내용과 방법들이 자신의 그것과 다르면 바로 철학이 아니라고 해버리는 편협함이 천재들에게도 종종 나타난다. 애교로 봐줄 수 있다.

러셀은 분석 철학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인정되는데, 언어로 세계를 정확하게 기술하는 방식이 세계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추론할 수 있게 해 준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그래서 그의 철학은 특히 수학과 논리학을 연결하는 등, 매우 심도 있는 사변성을 보여준다. 그는 철학을 신학과 과학의 사이에 있는 것으로 본다. “신학과 과학의 사이에 자리 잡고 양측의 공격에 노출된 채,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영역이 존재한다. 이 무인지대(No Man’s Land)가 바로 철학의 세계이다.”(버트란드 러셀 지음, 서상복 옮김, <서양철학사>, 을유문화사, 2009년 10월30일. 제17쪽)

신학과 과학 사이에 존재하는 세계

이런 철학관을 가진 사람에게 사변의 영역이 아닌 구체적 물질을 가지고 세계를 설명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탈레스가 철학자보다는 과학자로 취급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버트란드 러셀의 잘못이 아니다. 그렇다고 탈레스가 철학자 아닌 것도 아니다. 탈레스는 철학자이지만, 버트란드 러셀에게 철학자로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럴 수 있는 일이다. 버트란드 러셀도 철학자이고, 탈레스도 철학자이다. 모두 다 탁월한 사람들이다.

펠릭스 가타리와 함께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펴낸 들뢰즈는 또 러셀을 철학자라기보다는 논리학이나 수학에 매몰된 사람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들뢰즈에게서 철학의 중요한 과제는 명제의 분석보다는 개념의 창조이기 때문이다. 내재성의 철학이니 유목민의 철학이니 하는 말들도 모두 개념의 창조와 연관된다. 러셀에게는 매우 혼란스러운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경험이란 것이 들뢰즈에게는 오히려 철학이 생동하는 중요한 광장으로 등장한다. 탈레스, 러셀, 들뢰즈 모두 철학자이지만, 또 모두 상대방을 철학자가 아니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 명 모두 제대로 된 철학자들이다. 철학이 기묘한 놈이라 이런 일이 벌어질 뿐이다.

수학자들끼리 서로 마주보며 제대로 된 수학자인가 아닌가를 따질지언정 수학자도 아니라고 비판 할 일은 없을 것이다. 물리학자들끼리 서로 마주보며 수준이 있는 물리학자인가 아닌가는 따질지언정 물리학자도 아니라고 비판 할 일은 없을 것이다.

철학 이외의 다른 학문들은 대부분 그 학문의 제목을 통해서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알려진다. 하지만 ‘철학’이라는 학문은 그 제목만으로는 그 안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분명하지 않다. 심지어는 대 철학자들마저도 철학 연구를 할 만큼 한 다음에야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류의 책을 쓰고는 그의 철학 인생을 마무리 한다. 어떤 학문에서 이처럼 자신이 평생 몸담고 헌신했던 학문의 정체성을 정리하는 것으로 마무리 하는 경우를 볼 수 있겠는가. 평생의 과업을 ‘문패’ 다는 것으로 마무리 하는 꼴이다. 그 집 안에 어떤 장식이 있었느냐는 결정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제목이 그 학문의 정체를 분명하게 해주지 못하는 유일한 학문이다. 제목을 정의한 하는 것으로 최고의 업적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학문이다. 이것이 철학의 큰 특징이다.

철학에서 이런 오리무중의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철학’이 특정한 ‘내용’으로 규정되지 않고, 철학적인 ‘활동’으로만 되어 있다는 뜻이다. 풀어서 말한다면, 철학은 앞 사람이 개척하여 남긴 등산로를 누가 더 빨리 오르느냐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정해진 등산로를 오르는 방법과 기술 혹은 몰두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새로운 등산로를 개척하는 일이거나, 산을 누리는 방법 자체를 전혀 새롭게 해버리는 활동이다. 산의 존재 의미를 새롭게 하는 활동이다. 심지어는 산을 오르는 일 자체가 자전거 타는 일이나 요트 타는 일로 대체되어버리기도 한다.

단재 신채호, 조선 시대정신 중요성 역설

그래서 우리는 철학이라는 학문을 통해서 궁극적으로는 자기 스스로 ‘시대 정신’을 포착할 수 있는 독립적 사유 활동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독립적 사유 활동’이 파악한 시대 정신의 표현이 바로 창조나 창의 등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주요 선진국 혹은 강대국에는 그들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서고 싶으면 철학적 레벨에서 사유할 수 있어야 함이 자명해진다. 다시 본다면,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일은 누구의 철학을 취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속으로 스스로 걸어들어 가는 일이다.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시대정신을 파악하는 것! 지금 우리가 이 시대에 포착해야 할 우리의 시대정신은 무엇일까? 다른 곳에서 나타난 철학을 훈고하거나 끌어들여 사용해보려는 습성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정신적 독립을 시도해보는 일이 아닐까? 선진 레벨로 상승하는 일이 아닐까? 이쯤에서 1880년에 태어나 1936년에 생을 마감한 단재 신채호의 말을 다시 듣는다.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 이외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여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려 한다.”(<낭객의 신년만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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