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의 재밌는 철학] 문화는 고상한 ‘진리’ 아닌 삶의 ‘전략’

중국은 문화 가치를 중시하는 '인문' 생산국이다. 사진은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중국 작가 모옌이 베이징 국제도서전에서 독자와의 대화를 갖는 모습 <사진=신화사>

이것은 아주 피상적인 경험과 느낌에 불과할 수도 있다. 중국에서 문화나 인문학 방면의 일을 할 때 돈이 없어 일하기 어려운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물론 콘텐츠가 부실하거나 아니면 다른 주변부 이유들로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는 것을 본 적은 있다. 철학이나 사상을 다루는 인문학 방면의 학회에 기업인들이 기꺼이 후원하는 모습을 보는 일이 전혀 어렵지 않다. 물론 내가 관계하던 일이나 내가 본 것만 특히 그랬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피상적인 경험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말 할 수밖에 없다.

중국은 혁명을 해도 ‘문화(文化)’로부터 출발한다. 거칠었던 그 혁명도 이름은 ‘문화혁명’이었다. 경제가 일정 궤도에 오르고 나서 문화나 철학 등의 방면에 대한 투자와 지원은 더욱 활발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거의 모든 지방이 각자 가지고 있는 인문적 자산을 ‘얘깃거리’로 만들어 관광 상품화하거나 그 지방 자부심의 근거로 삼는다. 이런 투자는 ‘아래’로부터의 요구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국가가 먼저 주도한다는 점이 눈에 띈다. 문화나 철학에 대한 투자가 국가의 건강한 발전에 필수적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전통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여전히 피상적인 느낌이지만, 한국에서 ‘문화’나 ‘철학’을 대하는 태도는 중국의 그것과 조금 다르다. 한국에서는 문화 관련 일을 할 때 국가나 사회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받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지원을 하더라도 항상 찔끔찔끔이다. 문화나 인문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이 정말 있을까? 나는 ‘없어 보인다’고 대답을 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되었을까? 물론 이런 차이가 정말 존재하는지에 대한 근거가 확실히 준비된 것도 없지만, 만일 있다고 한다면 왜 그럴까? 그냥 그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말해보자. 내가 보기에 중국은 우리보다 문화나 인문의 가치를 더 잘 알고, 우리는 더 모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이상하게 들리기 쉽다. 왜냐하면, 우리가 중국보다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더 세련미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련미는 아직 전략적으로 완숙되지 않았다. 문화나 인문을 말하면서 ‘전략’이라고? 점점 더 이상해진다. 이제부터 내 이야기는 시작된다.

“낌새 모르면 역사?문명 주도할 수 없다”?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어중간한 철학은 현실을 떠나지만 진정한 철학은 현실로 돌아온다”고 말한다. 얼치기 철학자는 철학의 세계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마치 관념의 세계가 진리의 형식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것과 같다. ‘봄’이라는 개념이 잘 소통된다고 해서 ‘봄’이 실재성을 가지고 존재한다고 생각해버리는 것과 같은 일이다. ‘봄’은 없다. 땅이 온기를 품어 느슨해지고, 얼음이 풀리고 새싹이 돋는 사건들의 묶음을 ‘봄’이라고 부를 뿐이다. 봄이라는 개념에 빠지면 애석하게도 진짜 봄을 잃는다. 수준 높은 사람은 ‘봄’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도 사실은 ‘봄’을 구성하는 사건들을 느낀다. 그런 각각의 사건들이 진짜지 개념으로서의 ‘봄’이 진짜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수준 낮은 사람들은 ‘봄’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해야 진짜 ‘봄’을 이야기 하는 것으로 여긴다. 가변적 구체성이 진실인데, 추상적 보편성을 진실로 착각하는 것이다.

흔히들 ‘문화’나 ‘인문’ 혹은 ‘철학’의 영역이 현실과 유리되어 좀 더 고상한 옷을 입고 초월적 세계에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착각이 도를 넘어 그래야 하는 것으로 믿는다. 그래서 국가경영이나 일상생활과는 차원이 다른 어떤 것으로 치부해버린다. 그러면 이런 것들은 모두 ‘일부러’ 혹은 ‘일삼아서’ 해야 하는 것이 돼 버린다. 하지만 ‘문화’나 ‘인문’ 혹은 ‘철학’은 그 자체가 현실이다. 삶이거나 역사다. 다만 ‘문화적’으로나 ‘인문적’으로 혹은 ‘철학적’으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인문적 활동’을 통하여 스스로의 ‘인문’을 건축하는 데 미숙한 사람이나 국가는 외부에서 이미 체계화된 ‘인문’을 수입하는데 급급하게 된다. 그 수입품을 최고의 물건이라고 광고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 된다. 수입품으로 시장을 지배하려 하지, 독자적인 시장을 형성하여 대체품을 만들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독자적인 물건으로 채워진 시장을 갖지 못하는 민족은 항상 수동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피지배의 가능성에 항상 열려 있다.

세계를 조망하는 제국의 시선

문제는 ‘인문’을 국가전략이나 일상생활과 연동돼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인데, 우리가 그렇지 못한다면 왜 그럴까? 또 연동해서 하나의 틀로 볼 수 있는 나라는 또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선진국이 돼 본 적이 있느냐 없느냐 혹은 제국을 운용해 본 경험이 있느냐 없느냐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중국과 한국에서 그런 차이가 나타난다면, 이유는 분명히 중국은 제국을 운용해 보았고, 한국은 그렇지 못했다는 점이다. ‘인문’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이다. 인간이 세계에서 활동하는 결을 가장 근본적이고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다.

제국의 시선은 중진국이나 선진국을 훨씬 넘어 전체 세계를 관리할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런 종합적인 시선은 ‘인문’적 내용에서 선명하게 표현된다. ‘문화’가 세계 변화의 흐름을 돌발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인문’이 세계 변화의 결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 변화의 핵심에 도달할 수 없다. 변화의 핵심적 내용이나 방향을 모르고서 역사나 문명을 주도한다? 안 되는 일이다. ‘문화’의 내용이나 ‘인문’의 내용을 생산하는 나라에서는 그것들이 그들 삶의 ‘전략’으로 등장한 것인데, 수입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매우 고상한 보편성을 갖춘 구조물로 둔갑한다. ‘전략’이 ‘진리’화 해버리는 것이다. 한번 주도권을 놓치면 회복하기 힘든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생산자들은 이미 지난 것으로 치부하고 지나가버린 죽은 ‘전략’을 ‘진리의 이념’으로 숭앙하다가 아직도 ‘이념’적 갈등을 벗어나지 못하고, 국가 전체를 비효율로 끌고 가는 그 잘난 사람들은 ‘미학’도 ‘정치’임을 알 리가 없다.

지난 7월23일 박근혜 대통령은 리샤오린 중국 인민대외우호협회 회장을 접견하고, 특히 인문교류의 확대를 강조하였다. ‘인문’이라는 같은 단어를 쓴다고 해서 같은 ‘인문’이 아니다. 중국은 ‘인문’도 ‘전략’이었던 경험을 피 속에 담고 있는 나라이다. 중국은 ‘인문’ 생산국이었다. 자! 어떻게 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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