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의 재밌는 철학] 변화의 원천은 갈등과 고독
개를 본다. 내 손을 핥으며 꼬리를 흔드는 개. 눈이 참 귀엽구나. 장난기도 보인다. 그런데 종으로 나눌 때 가장 근친관계에 있을 법한 늑대의 눈은 갑자기 달라진다. 늑대의 눈에서는 뭔가 슬픈 기운이 느껴진다. 처연하다고나 할까? 매우 쓸쓸하다. 개는 따뜻하지만, 늑대는 쓸쓸하다. 개와 늑대의 눈은 왜 이토록 다른 느낌을 줄까?
개는 이곳을 보는 것 같고, 늑대는 저곳을 보는 것 같다. 개는 여기 있는 주인에게 밀착하려 하지만, 늑대는 인간의 밀착을 매우 싫어한다. 개는 인간을 따라 살려고 하지만, 늑대는 인간과 일합을 겨루려는 태도를 지킨다. 개는 어깨를 들썩이며 깡충깡충 뛰지만, 늑대는 들썩거림이 없이 미끄러지듯 활주한다.
개는 귀엽지만, 늑대는 의연하다. 주인을 핥거나 주인에게 꼬리를 흔드는 일을 하지 않는 늑대는 주인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려 한다. 그래서 늑대는 주인에 대해 항상 고독을 불러들인다. 스스로 불러들인 이 고독의 깊이는 눈으로 침투하여 쓸쓸하게 드러난다. 그 처연한 눈빛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자라야 늑대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사자의 눈을 보자. 늑대보다 더하다. 한없이 쓸쓸한 그 눈빛에 나는 무섬증보다도 내가 먼저 사자가 지키는 그 고독의 지경으로 따라가 버릴 것만 같다. 이제 알겠다. 강한 놈일수록 눈빛은 더 쓸쓸하고 처연하구나. 호랑이도 그러하더라. 강한 자의 눈빛은 쓸쓸하다. 쓸쓸한 눈빛은 고독에서 나온다. 고독을 감당하는 놈이라야 강하다.
어떤 친구가 말한다. 휴대폰이나 텔레비전, 신문 없는 곳에서 딱 1주일만 혼자 있으면 원이 없겠다고. 나는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해주었다. 혼자 있으면서 편안할 수 있는 일은 매우 깊은 내공이 있는 사람에게나 가능하다는 말도 했다. 혼자서 그 고독의 깊이를 온통 감당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자신의 함량을 가늠해보고자 하는 사람은 무조건 익숙한 자신을 벗어나 떠나보라.
처연한 야생의 눈빛
그러나 떠나는 일이 단순히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을 지배하던 이념과 신념이 결부된 시간의 문제가 되면 한없이 불안해져 버리는 자신을 발견하고야 말리라. 고독은 그 고독을 자초(自招)할 힘이 있는 사람에게서라야 비로소 고독 그 자체로 현현한다. 강제된 고독은 그저 불편이나 고통일 뿐이다. 고독을 자초할 수 있을까?
장자가 아주 훌륭하다는 말을 들은 초나라 왕이 그를 재상으로 모시고 싶어 사신을 보냈다. 장자가 일갈한다. “나를 욕되게 하지 말고 당장 돌아가시오. 나는 차라리 더러운 진흙탕에서 스스로 즐거워할지언정 통치자에게 얽매이지는 않겠소.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고 내 뜻대로 지내다 가겠소.”
천하는 전체이고 보편이고 집단이고 정해진 틀이다. 장자는 스스로 자신을 ‘갈등구조’ 속으로 내몬다. 자신을 동력의 발동자로 만들어 이미 정해져 고착된 전체에 맞서도록 내몰면서 아무도 시도하지 못한 새로운 갈등을 생산해버린다. 그것도 지지자를 구하거나 동료를 만드는 구차하고 번잡스런 절차를 깡그리 무시하고, 오직 혼자 덤볐다.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았다. 근거를 찾지도 않았다. 자기 자신만의 쾌락(自快)과 자신만의 의지(吾志) 외에는 결정의 주변에 아무 것도 없다. 오직 혼자서 덤비는 이 전선, 얼마나 장엄하고 고요한가. 얼마나 두렵고도 두려운가. 그러나 그는 그렇게 했다.
세계는 변한다. 누구나 인정하면서 누구도 정면으로 응시하려 하지 않는다. 변화가 자신의 일로 다가올 때, 사람들은 피한다. 왜? 쓸쓸해지기 싫어서. 내 계급이 변하고, 내 소신이 밀려나고, 내가 믿는 이념이 흔들릴 때, 그것들을 ‘모든 것은 변한다’는 원칙 안에 차마 놓기 싫어한다.
장자가 체현한 ‘먼저 온 자’의 운명
내가 믿는 이념이 30년 전, 40년 전 것이라 해도, 그것을 믿으면서 어울려 따뜻하게 지냈던 ‘동지’들을 잃을까 봐 감히 변화를 시도하지 못한다. 공유하는 이념 속에 있던 ‘우리’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마치 죽음 같다. 그래서 익숙함으로부터 결별하고, 정면으로 그 익숙함에 맞서 갈등구조를 생산할 수 있는 사람이 귀한 것이다. 영웅이 귀한 이유이다.
모든 변화는 갈등의 흐름이다. 간단하다. 이렇게 있던 것이 저렇게 달라지는 것, 이 자리에 있던 것이 저 자리로 가는 것, 이것이 저것으로 달라지는 일을 우리는 변화라고 한다. 달라지는 일이 빚어지는 곳이 ‘갈등’의 발주처다. 자신의 튼튼한 입지에서 한 쪽 발을 뗀 다음 천천히 아직 정해지지 않은 빛을 향해 무게중심을 이동한다. 친구들 모두 튼튼한 입지에 내린 뿌리를 뽑지 않고, 거기서 안정되고 편안하고 따뜻할 때, 봐서는 안 될 것을 봐버린 사람처럼 결정해버린다. 갈등의 구조 속으로 나는 가자! 혼자여도 가자! 그는 운명처럼 혼자일 수밖에 없다. 친구들이 배신자라고 해도 쓸쓸하게 혼자 떠난다. 영웅은 그래서 외롭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한다. 이 말은 철저히 인간 편에서 한 말이다. 그렇지 않다. 강산은 어제도 변했고, 지금도 변하고 있다. 보통의 인간들이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최소의 시간이 10년이라는 뜻일 것이다. 어제도 변하고 지금도 변하고 있는 강산을 보통의 인간들은 10년 정도가 지난 다음에라야 알 수 있다는 뜻이다.
변화의 가닥을 시시각각 감지하는 능력을 갖게 된 예민한 사람들은 10년을 기다릴 수 없다. 기어이 그 변화의 가닥 위에 올라타려 한다. 그럴 때는 보통 혼자다. 쓸쓸한 이 모험을 감당할 수밖에 없도록 태어난 자들은 천형을 받은 것처럼 그 부담을 떠안는다.
혼자이기를 두려워하는 자는 ‘먼저 온 자’가 될 수 없다. 모든 창조는 이 두려움을 가벼이 건너뛴 사람의 몫이었다. 건너뛰면서 스스로를 ‘갈등구조’ 속으로 귀양 보낸다. 늑대의 털이 아무리 따뜻해도, 쓸쓸한 눈빛을 데울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쓸쓸함은 강요된 것이 아니라, 자초한 것이므로 늑대에게는 ‘힘’이다. 이 ‘힘’을 가진 자는 따뜻한 곳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친구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케 생각하지 않고, 성큼성큼 나아간다. “사람들이 몰라줘도 화내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겠는가!”란 공자의 말이 이런 뜻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왜 쓸쓸한가? 혼자이기 때문이다. 고독하기 때문이다. 정해진 곳 안에서 ‘우리’로 지내는 일이 이미 생명의 활기를 놓친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나’는 그 ‘우리’를 벗어나 ‘혼자’가 될 수밖에 없다. 스스로 ‘고독’을 자초할 수밖에 없다. ‘변화’를 놓친 맥 빠진 ‘우리’들을 연민의 정으로 바라보는 따뜻한 자태를 지키면서도, 나는 그저 쓸쓸할 뿐이다. 그래서 장자는 최고의 인격을 이렇게 표현하더라. “봄날처럼 따뜻하면서도, 가을처럼 처연하구나(凄然似秋, 煖然似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