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의 재밌는 철학] ‘읽기’로 발견한 나, ‘쓰기’로 확장된다
2013년 10월8일 경기도 화성시 정남면 문학리 야산에 비가 내리고 있다. 가을빛 차지하려는 잎사귀들의 노고에 짐이 되지 않도록 매우 조심스럽다. 이곳저곳 형편 봐가며 내리다가 빗물 자리가 듬성듬성해졌다. 아주 먼 하늘에서부터 수용해버린 중력에다 몸을 내맡겨버렸으니 직선으로 꽂혀야 마땅하나, 오는 동안 그새 깨달음이 컸던 모양이다. 흔들리기도 하고, 비키기도 하고, 속도를 줄이기도 하고, 지상의 형편 잘 살펴 옆으로 피할 줄도 알게 되었다. 그런 성숙한 비가 내리고 있다. 그 성숙은 아마도 자기가 받아들여질 대지를 매우 자세히 읽은 결과로 빚어졌을 것이다.
빗방울은 그 이름을 받는 순간 낙하의 운명을 실현한다. 빗방울이 낙하하며 겪는 속도는 그가 세상을 읽는 속도와 맞먹는다. 낙하는 빗방울에게 하나의 ‘읽기’이다. 낙하하며 겪는 공기의 저항과 질감뿐만 아니라 상하 좌우로 부는 바람들도 ‘읽기’가 벌어지는 환경이자 조건이다. 빗방울은 운명처럼 대지의 어느 한 쪽을 지정 받아 송곳처럼 꽂히며 자신의 시선을 대지의 다양한 모습들에 구겨 넣는다. 왜 하필 그 자리일까? 이것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겨두자. 어차피 비율에 딱 맞는 설명법으로는 해결 안 될 문제다. 우리가 어느 비 오는 날 오후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어느 책을 손에 넣는 것도 같은 이치 아니겠는가.
해석되지 않는 자리를 지정 받아 빗방울은 이제 대지의 초대에 겸허히 응한다. 대지가 만든 길을 따라 흐르고 흐르며, 대지가 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넓게 파인 물길은 천천히 흘러주고, 좁게 파인 내리막길은 급히 내려준다. 호박 밭에서는 호박의 말을 듣고, 오이 밭에서는 오이처럼 행동해본다.
손님으로 왔다가 대면한 자기 자신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아무리 대지의 초대에 공손히 정중히 응한다 해도 어느 순간이 되면, 나라면 어땠을까 하는 반성의 시간을 만나게 된다. 대지가 만든 길이 막히는 경우를 만나게 된다. 이것도 참 운명 같은 일이다. 어느 순간이라고 정할 수는 없어도, 반드시 그런 순간을 만나게 되는 것만큼만은 사실이다.
이 때 빗방울은 손님으로 있으면서 갑자기 자기 자신을 대면하게 된다. 이제 집주인에게 손님이었던 자기가 스스로에게는 주인이 되어버린다. 자기 자신에게 있는 고유한 무게와 중력을 타고 자신의 운동을 스스로 생산하게 된다. 새로운 물길을 만드는 것이다. 이제 이 빗방울은 자신의 길을 따라 어느 옥수수뿌리를 만나게 될 것이다. 거기로 스며들 것이다. 옥수수 한 방울 안으로 스며들어 빗방울은 새로운 존재가 된다. 자기가 우주의 영역으로 확장되는 일이 찰나에 일어나 버렸다. 이제 빗방울은 자신의 활동을 ‘쓰기’의 맥락으로 전환시켰다.
우리는 끊임없이 읽는다. 책을 읽지 않더라도 마주치는 모든 사건과 세계를 읽고 또 읽는다. 산다는 것은 그래서 ‘읽기’이다. ‘읽기’의 원초적 동인은 무엇인가? 바로 지루함이다. 건조함이다. 쾌락과 즐거움을 원하기 때문이다. 건조한 대지 위에 비가 내리려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읽기’는 일상의 여러 편린들 가운데 그저 그런 또 하나에 머무르지 않고, 바로 존재론적 의미를 가져 버린다. 읽으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은 쾌락을 원하지도 않고 심심함을 자각하지도 못한다. 자신의 존재가 자신에게서 확인되지 않으니,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다. 지루하거나 심심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자기 존재의 터전이다.
살아있는 사람은 읽기를 한다. 이는 다른 (사람의) 세계로 초대받는 일이다. 지루함을 시시각각 자각하는 힘이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만의 생명력을 잘 지키고 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뿌리가 튼튼해 열등감에 사로잡히지 않기 때문에 이것저것 자잘하게 따지지 않고 그 초대에 기꺼이 응한다. 초대자의 이야기에 조용히 귀를 기울인다. 귀 기울이기가 무르익을 무렵, 그래서 초대자가 닦아 놓은 길들이 편안해질 때쯤, 그 길 위에서 오히려 자신을 만나는 일을 경험하게 된다. ‘읽기’는 결국 자기 자신을 만나는 일로 성숙해진다. 읽는 일을 통해서 우리는 초대자와 대화하게 되고, 대화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초대자의 안내로 그가 준비해 놓은 길을 걷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길을 찾게 되어버리는 극적인 소득, 이것이 ‘읽기’의 소명이다.
생명 있는 주체는 부단히 들락거린다
읽다가 자신을 대면하면 이제 자신의 길을 도모하게 되리라. 읽기로 찾아진 자기 자신의 생명력이 확장의 욕구를 표현하게 되는 형국이다. 수용의 형식에서 발산의 형식으로 전환되는 이 과정은 읽기가 매우 성숙해질 때쯤 형성되는데, 그 발산의 형식을 우리는 초점을 좁혀 총체적으로 ‘쓰기’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읽기’는 수용이고, ‘쓰기’는 발산이자 표현이다. 이 극적인 일은 ‘자기 자신’에게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주의하자. 우리가 읽는 그 무엇은 다른 사람이 써 놓은 것이다. 나의 ‘읽기’는 타인의 ‘쓰기’이다.
이런 의미에서 ‘읽기’에는 ‘쓰기’가 ‘흔적’으로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읽기’가 ‘읽기’만으로 있고, ‘쓰기’가 ‘쓰기’만으로 있지 않다. 어디 읽기, 쓰기만 그러하겠는가. 모든 일이 그러하다. ‘쓰기’와 ‘읽기’는 다른 두 사건이 아니라 기실 하나의 사건이자 하나의 동작이다. 다른 두 측면일 뿐이다. 이렇게 본다면, ‘읽기’의 과정에는 반드시 ‘쓰기’의 활동이 예정되어 있다. 들어오는 일은 나가기 위해서이고, 나가는 일은 들어오기 위해서이다. 들어오기만 하고 나가지 못하거나,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생명’으로 승화될 수 없다. ‘생명’력이 넘실대는 주체가 되지 못하고, 한 편에 말뚝처럼 서 있을 수밖에 없다. 성장이나 변화는 바라지도 못한다. 생명력이 있는 살아있는 주체는 들어오기만 하거나 나가기만 하지 않고 부단히 들락거린다. 들락거려야 주체는 무럭무럭 자란다.
‘읽기’와 ‘쓰기’는 하나의 활동이다. ‘쓰기’ 활동이 예정되어야 비로소 ‘읽기’는 살아있는 사람의 것이 된다. 옥수수의 생명이 되었던 물방울이 긴 여정 후에 승천하여 다시 지상에 강림하는 것을 통해 볼 수 있듯 하강과 상승을 하나의 사건으로 품은 물방울만이 비로소 생명이 되는 것과 같다. ‘읽기’와 ‘쓰기’가 하나의 활동으로 내장될 수 있는 주체를 우리는 비로소 독립적 주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독립적 주체는 ‘읽기’를 사명감으로 하거나 기억하기 위해서 하지 않고, 우선 재미로 혹은 심심풀이로 할 것이다. 주장하기 위해서 읽지 않고, 이야기하기 위해서 읽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