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의 재밌는 철학] 인문학 열풍의 종착역은?
궁극적 지향점은 ‘지식 창고’ 아닌 ‘자기생각 찾기’
혹자는 말한다. “철학은 국가 발전의 기초다.” 이 오리무중의 주장 속에 언급된 철학은 무엇일까? 일상에서도 철학은 자주 언급된다. “그 의견은 너무 철학적이야.” 혹은 “우리 이제 철학적으로 접근해보자.” 이때의 철학은 또 무엇일까? 우리가 ‘철학’이란 단어의 함의를 정말 체감하면서 사용하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
지금 한국에는 인문학이 열풍이다. 인문학이 발생했다는 것은 사실 인간이 ‘철학적 시선’을 희망했다는 뜻이다. 지금 한국에 인문학의 열풍이 부는 진정한 이유가 한국인에게 이해되고 있을까? 한국인은 지금 인문학적 지식을 쌓는 것이 인문학을 공부하는 최종 목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문학적 지식이란 것이 인문적 활동이 낳은 결과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곳은 인문학적 지식이 쌓인 창고가 아니라 인문적 통찰을 기다리는 구체적 세계임을 아는 사람이 정말 많을까? 이것들은 모두 “철학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귀결되어 버린다.
철학은 우리에게 알려지기 쉽지 않은 ‘놈’이다. 우리가 시작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840년 아편전쟁으로 동양에게 철저한 패배를 안긴 승리자 서양의 행진곡을 따라 들어온 놈이다. 태생적으로 우리의 동포가 아니다. 게다가 우리는 인문학적이라고 할 수도 있고, 철학적이라고 할 수도 있는 수준의 시선을 가지고 삶을 영위해 본 경험이 없다. 삶의 경험, 활동의 경험 속에서 작동되지 않는 학문은 그냥 축적된 지식을 헤집는 일 이상을 하지 못한다. 생활과 창조의 동력으로 활동하지 못하는 학문은 그냥 책장에 들어앉은 지식 덩어리에 불과하다. 잘 해야 누가 더 많이 아는가를 점잖게 드러내는 고상한 말잔치 자리의 말 반찬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철학은 그랬다.
철학이 어떤 놈인지를 알기 위해서 철학의 출생 과정을 먼저 들여다보자. 출생의 비밀을 알면 그 다음의 행적이 훨씬 잘 이해되기 때문이다. 버트란트 러셀의 말처럼 “대부분의 철학사 첫 부분에서 철학은 만물이 물로 이루어졌다고 말한 탈레스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언급한다.” 일반적으로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는 말은 최초의 철학적 주장으로 받아들여지고, 그래서 탈레스는 최초의 철학자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그런데 러셀은 탈레스를 최초의 철학자라고 한 것에 대해서 불만스러워 하는 것 같다. 탈레스의 이런 주장을 최초의 철학적 주장이라고 기록한 것을 보고서 “철학에 대한 존경심을 느끼려 애쓰는 초심자에게 실망만 안겨준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렇게 커 보이는 러셀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존경하는’ 러셀을 통해서 철학의 문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러셀 자신이 실망을 안겨주는 것은 아닐까?
러셀이 탈레스를 존경하는 이유
러셀은 탈레스를 “철학자보다는 과학자로서 존경해야 할 것이다”고 말한다. 이런 결론을 접하고 보면, 러셀은 아마 탈레스가 한 ‘철학적 활동’보다는 ‘명제의 내용’에 집중해서 판단하고 있는 듯하다. ‘세계의 근원’에 대하여 탈레스가 한 ‘생각’에 집중하지 않고, ‘물’이라는 내용에 집중하여 한 평가다. 탈레스를 최초의 철학자로 만든 것은 만물의 근원에 대하여 ‘물’이라고 한 주장의 내용이 아니라, 그러한 내용의 주장이 나올 수 있도록 탈레스 스스로 걸은 사유의 여정에 있다.
탈레스가 ‘최초’가 되기 전까지 그리스 사람들은 그럼 만물의 근원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었을까? 개괄적으로 보아서 그리스 사람들은 모두 “세계의 근원은 신이다”라고 믿었다. 제도나 가치의 표준까지 포함해서 만물을 모두 신이 결정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누구나 만물의 근원을 신이라고 믿을 때, 탈레스는 혼자서 독립적 자세로 깊고 깊게 ‘생각’하여 “아니다!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고 말했다.
그가 이 말을 하게 된 계기는 신의 계시에 의해서도 아니고,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믿음에 의해서도 아니다. 탈레스가 철학자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모두가 만물의 근원에 대하여 신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고 ‘생각’한 것이다. 탈레스의 경이적인 역할은 우리를 믿음의 세계에서 생각의 세계로 끌고 나왔다는 점이다. 인류 최초의 일이다. 그래서 그는 최초의 철학자가 되었다.
탈레스가 최초의 철학자가 되기 이전에 그리스 사회에서는 주도권이 신에게 있었다. 신이 주도권을 가진 세상에서 인간이 할 일은 신의 말씀을 믿는 일이다. 신의 말씀과 신의 활동은 신화의 형식으로 체계를 갖춘다. 탈레스는 믿음의 확실성에서 온 계시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자신만의 생각으로 세계의 비밀을 자신의 언어로 나타냈다. 믿음을 뚫고 나와 생각을 한 것이다. 따라서 세상의 주도권을 신으로부터 뺏어와 인간에게 돌려주려 하였다. 최초의 시도인 것이다. 종합해서 말한다면, 탈레스는 인간을 신화의 세계에서 벗어나 철학의 세계로 넘어가도록 시도하였다. 결국 철학의 시작은 신화로부터의 이탈이다. 믿음으로부터 벗어나 생각의 활동으로 진입하는 일이다. 신으로부터 벗어나 인간으로서 독립하는 일이다. 인류에게 철학이 시작되었다는 말은 인류가 신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하였다는 말과 같다. 이 최초의 독립을 탈레스가 스스로의 생각으로 이뤄냈다. 탈레스를 최초의 철학자로 부르는 일은 누구에게나 매우 당연하다. 초심자에게라도 철학에 대한 실망보다는 존경심을 갖게 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탈레스를 통해서 보았듯이 철학의 탄생은 신으로부터의 인간의 독립에 있다. 결국은 독립정신이다. 믿음으로부터의 독립이다. 그것이 진리가 되었든 신념이 되었든 이념이 되었든 믿음을 갖는 일은 철학하기와는 거리가 있다. 모든 믿음은 정지한 것이고, 완벽하다고 설치는 것이고, 지나간 것을 지키는 일이고, 다가오는 것을 비웃는 일이다. 뿌리박는 일이고, 고정시키는 일이고, 정해진 틀을 지키는 일이다. 생각이 작동하는 순간 이미 정해진 모든 것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움직이게 된다. 몸은 기존의 틀 속에 있어도, 눈은 다가오는 새로운 빛을 본다. 다가오는 세계의 빛을 본 눈은 자신의 몸을 앞으로 기울게 만든다. 여기서 만들어진 기울기가 바로 누군가를 최초로 만들고 철학자로 만든다. 생각이 빚어낸 기울기와 철학의 터전이다. 인간으로서의 탁월함이 등장하는 광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