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의 재밌는 철학] 심업과 뽕뽕이 “경계를 세우다”
작품은 바로?예술가 자신일 뿐
예술에서는 작가가 작품이다. 어떤 예술 작품이 일류인 이유는 일류일 수밖에 없는 그 작가가 그대로 작품 속에 서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검열도 거치지 않아야 한다. 자기 몸에 머물지 못하고 밖으로 튕겨져 나온 자기 스스로가 작품의 형태로 새로 태어날 뿐이다. 무엇을 표현하려고 머리를 쓰는 순간 끝이다. 나는 화가나 조각가 혹은 피아니스트와 같은 레벨에서의 분류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그 보다 한 단계 높은 미술가나 음악가로서 분류된 레벨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절정, 예술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적어도 그것이 예술이 되려면 어떤 사고도 하찮아야 하고 오로지 우주를 내려다보는 오만한 눈빛으로만 무장해야 한다. 예술가에게는 친구도 없고 가족도 없다. 연인도 자기를 위한 열정의 파편이었을 뿐이다. 오직 햇볕을 수선스럽게 흐트러뜨리는 바람만 잠시 머물다 간다. 우주에 대면하는 오직 스스로의 자기 자신, 이것의 예술의 뿌리이다.
그래서 예술가는 바로 제우스다. 제우스보다 더 나은 예술가가 생각나지 않는다면 내 말이 맞다. 푸코의 다음 말을 들을 필요가 있다. “제우스는 누구일까요? 그는 단순히 자기 자신만을 돌보는 존재입니다. 완벽한 순환성 속에 있고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일종의 순수 상태의 자기 배려, 바로 이것이 신성한 요소를 특징짓습니다. 제우스는 누구일까요? 그는 자기를 위해 사는 존재입니다.”
예술가 ‘심업’…”의리 있고 산만하며?난폭한, 야수적인?그”
이 글은 어린 시절부터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을 더 많이 해왔던 친구가 달라지지 않은 것, 점잖아지지 않은 것에 대한 찬사의 일종이다. 심업의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에는 “의리는 있으나 주의가 산만하고 난폭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최금수는 요즘 말로 표현하면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호기심과 도전 정신이 뛰어남” 정도일 것이라고 보는 것 같지만(‘트라우마 덩어리의 티모스적 상상력’, 『월간미술』330, 2012년 7월, 제130쪽), 그러면 바로 심업이 아니게 된다. 심업은 생활기록부에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였다.
1980년 5월 광주의 밤거리에서 광분하고, 입대 후 휴전선 앞에서 “북도 아니고 남도 아니다”라고 외치면서 총기를 난사하다 후방의 병원으로 내려간 것도 모두 ‘의리, 산만, 난폭함’의 지속이었을 뿐이다. 그에게는 공격과 방어로 길이 난 근육보다도 계산과 비율의 틀을 잃어버린 생각이 더 울퉁불퉁하였다. 그것이 항상 문제였다. 그런데 심업에게 있던 그 생각은 따지고 보면 인간의 범위 안에서는 생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아마 생각 이전의 ‘동물성’에 더 가까운 어떤 것이었다. ‘감정’이나 ‘감성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 것은 아직 인간 이전의 야수적 본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심업의 거칠었던 일상은 그 야수적 본능에 가까운 내면의 고유한 충동이 기존의 정해진 것들과 빚는 갈등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에게 인간사로 채워진 공간을 물흐르듯이 관통하는 일은 애초부터 쉽지 않은 일이다. 심업은 한 번도 순치된 적이 없다. 자기만의 깊은 공력이 있지 않고서는 긴 시간 순치되지 않기도 힘들다. 여기서 그의 힘이 나온다. 심업의 ‘예술력’은 바로 순치되지 않은 그의 야수적 본능이다. 아직 인간 이전의 언어에 머물고 있는 미숙함이 그의 힘이다.
‘저항’…인간 생존의 표현?양식
자신을 자신이 규정한대로 믿어버리는 것이 인간이다. 긴 시간동안 인간은 스스로를 ‘이성적 동물’로 정하고 살아왔다. 인간에게 있는 본능적 동물성을 어떻게 이성으로 질서화하고 비율을 잘 맞추어 행사되게 하는가가 ‘덜 인간’보다 나은 ‘더 인간’을 가려내는 척도였다. 인간을 ‘계산’의 능력인 이성의 틀로 이해했던 삶은 보편적 계산의 얼개에 자신을 편입시키지 않고는 자신의 존재가 스스로 의미를 갖지 못하였다. 산다는 것은 정작 집단적 이념의 공간 속으로 내몰리게 되는 과정이었다. 결국 집단적 이념을 내재화 한 것을 자신의 가치로 착각한 인간은 자신이 종속적인 주체로 전락해 가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정말 자신으로 존재한다고 착각한 채 시간을 겪어야 되었다.
예술가로서의 심업은 이것을 동물적 촉수로 느끼고 부단히 저항했다. 자기가 아닌 것이 자기 안에 머무는 것을 단 1초도 견디지 못하는 그는 자본주의와 기독교를 적대시한다. 그에게 자본주의와 기독교는 근대 이념의 총화였고 결국 각자의 내면을 파고들어 주체화시키면서 폭력을 숨기고 있는 것으로 보여졌다. 심업에게 이 음험한 폭력의 대행자 혹은 상징은 미국이었다.
2010년 중국 북경에서 심업은 그 생애 최초의 개인전을 갖는다. 제목은 ‘창천(?天)’. 나에게 읽혀진 주제는 저항이었다. 개인전 현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제국주의와 극단적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미국 자유의 여신상이었는데, 심업은 그 자유의 여신상을 탐욕과 폭력의 온상으로 표현하였다. 예술가는 오로지 자신만을 표현하기 때문에 즉 자기가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자기를 관찰하는 또 다른 자기를 생성할 능력을 갖지 못하여 왕왕 자신이 무엇을 표현하는지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 스스로에게조차 자각되지 못하는 것의 표현. 이것이 정리되지 않은 ‘철없는’ 예술가들이 흘리는 필연적 예술성인 경우가 왕왕 있다.
탐욕과 폭력에 대한 심업의 분노가 표현하는 것은 메타적 차원에서 궁극적으로는 ‘저항’이었다. 그의 분노가 다다른 곳, 책임을 물으려고 한 대상은 현대 자본주의와 근대 산업화가 도달한 극단적 탐욕과 폭력이었지만, 그 시선이 마지막 순간에 쓸쓸해지는 이유는 바로 그것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항!” 저항 자체는 바로 인간 생존의 표현 형식이다. 인간 생존의 모든 과정이 바로 저항으로 완성된다. 어머니의 자궁을 벗어나는 것도 저항의 일종이다. 하나의 개체가 자신의 생명을 외적으로 확산하는 과정도 저항의 형식이다. 저항의 형식을 가져야만 살아있음이 확인된다. 생존에 대한 강한 갈망의 표현이 저항이라고 보면 그의 작품에는 역설적이게도 삶과 생명에 대한 의지의 폭발이 폭발되지 못한 채 내재해 있다. 찬란한 빛을 뿌리고 있는 자유의 여신상에 심업이 남긴 녹과 부식에서 오히려 그의 갈망이 얼마나 강력한가를 볼 수 있다. 저항과 갈망, 이 불일치 속에서 그는 의리는 있으나 주의가 산만하고 난폭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뽕뽕이’…현대, 관계, 손님, 비존재적 특성으로의 존재
심업은 두 번째 전시회를 갖는다. 그의 진화는 급격했다. 돌연변이는 아니지만 몇 단계 동작을 축소하고 직선으로 급소를 가르는 자객처럼 매우 급했다. 불일치의 양면을 따로 존재하게 하지 않고 바로 하나의 사건으로 움켜 쥔다. 아마 의식하고 계산하여 머리를 써서 표현하려 했다면 심업답지 못한 어설픈 가식이 되었을 확률이 크다. 하지만 그는 ‘표현’으로 들지 않고 아무 생각없이 ‘재료의 세계로 들어갔다. 이 재료는 발견되거나 구매된 것이 아니라, 심업이 다가갔거나 아니면 스스로 심업에게 다가온 것이다. 예술가에게는 재료가 또 하나의 자기이지 않은가. 심업은 그의 감각이 성숙되어감에 따라 무턱대고 새로운 재료를 사용하게 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일명 ‘뽁뽁이’라고 불리우는 포장재료이다. ‘뽁뽁이라는 발음은 그 재료가 가지는 특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나는 그것을 ‘뽕뽕이’라고 부른다.
‘뽕뽕이’는 그 재료적 특성 자체로 ‘현대’이다. 현대란 무엇인가? ‘실체’를 기반으로 하던 근대를 벗어난 현대는 바로 ‘관계’의 세계이다. 이 실체관에서 ‘본질’이 나오고 ‘구분’이 나오고 ‘동일성’이 나오며 ‘이념’이 둥지를 틀고 그 ‘이념’의 자기장 속에서 ‘폭력’이 드러난다. 심업이 저항하는 대상으로서의 자본주의나 미국은 바로 이 ‘실체’관의 형상화에 다름 아니다.
자, 여기서 ‘관계’라고 한다면 우리는 바로 ‘이것’과 ‘저것’ 사이의 관계를 떠 올릴 수 있다. 하지만 이것과 저것 사이의 관계는 실체들 사이의 관계로서 결국 실체관의 범주 안에 들어 있는 관계일 뿐이다. 우리에게 경험되는 진화의 정점에서 우리가 현대의 ‘관계’를 말한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 자체가 ‘관계’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실유(實有)’ 아니라 ‘가유(假有)’이다. 불교의 당체공(當體空)을 생각하면 된다. 배타적 본질을 근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비존재적 특성로서만 ‘오히려’ 존재하는 것이다.
뽕뽕이는 모든 것의 손님으로 존재한다. 모든 것을 손님으로 대하면서 존재한다. 자기의 존재성을 죽이고 상대방으로 스며들어야만 비로소 자신의 존재 가치가 설정된다. 사용되면서라야 비로소 ‘사용자’로서의 권위를 확보하는 이 이상한 놈은 자신의 2차적 존재성으로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매우 독특한 현대적 존재이다. 자신의 ‘가유’적 특성으로 인해 그 자신이 직접 ‘관계’가 되어버린다.
그런 이 ‘관계’가 왜 예술적 힘이 되는가?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킬레우스를 기억한다. 테티스는 그의 아들 아킬레우스를 불사신으로 만들기 위해 제우스의 조언을 받아들여 스틱스(Styx) 강에 담근다. 다른 강이 아니라 스틱스 강에 담가야 불사신이 된다는 것이 참 재미있다. 스틱스 강은 생과 사의 경계에 있는 강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생과 사의 대립면이 관계를 이루는 그 교차의 경계에서 불사의 힘이 나오는 것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한 편을 선택하여 편안하려 하거나 분명한 입장을 추구하는 것은 소인배들의 일이다. 이런 점에서 좌파도 소인배고 우파도 소인배다. 한 편을 선택하여 차지하는 편안함을 본능적으로 힘겨워하지 않는다면, 그는 소인배로 태어난 것이 분명하다. 예술적 영웅은 한 편에 서지 않는다. 대립면의 경계에 선다. 경계에서 생산되는 부단한 불안이 그의 예민함을 지탱해주고, 불안을 견디는 공력으로 그의 독립적 정신은 단단해진다.
“불안정성을 감촉하는 자, 천하를 맡아라”
천하를 장악할 수 있는 성인의 행태를 노자(老子)는 말한다. “총애를 받거나 수모를 당하거나 모두 깜짝 놀란 듯이 하라(寵辱若驚).” 천하를 장악하고 싶다면, 너는 총애와 수모 중 하나를 선택하는 천박한 자리에 있지 말고, 총애와 수모 사이의 경계에만 서라는 말이다. 총애와 수모의 경계에 서서, 그 경계가 생산하는 ‘불안정성’을 세계의 진실로 감촉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천하를 맡아도 된다는 것이 노자가 여기서 구사한 문장의 결론이다.
관계에서 오는 ‘불안’은 곧바로 탄성을 산출한다. 제자리를 찾아 안정적으로 서 있는 것은 사실 삶을 마감한 상태이다. 그것들은 모두 죽은 것이다.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로서 이미 죽었고, 사회주의는 사회주의로서 이미 죽었다. 사회주의 입장에서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일은 이미 저항의 생명을 잃은 사자(死者)들의 멀뚱거림에 불과하다. 자본주의 입장에서 사회주의를 비판한다고? 자신의 죽음을 되뇌이는 일일 뿐이다. 관계를 함축하는 경계의 존재는 아무것도 말하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립하는 양면을 모두 살려내어 팽팽한 긴장을 견디게 만든다. 산 자도 아니고 죽은 자도 아닌 것이 마치 유령처럼 존재한다.
뽕뽕이는 유령같은 것이다. 자기 스스로 관계이고, 자기 스스로 경계이면서 맥 없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맥없음 안에서 발견되는 ‘탄성’을 우리는 구체적으로 느낀다. 방 하나 하나에 탄성을 가득 채우고 아무런 의지 없이 어떤 실체(實體)를 위하러 길 떠날 채비를 하듯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무심한 그 놈 앞에서 그 놈의 공력을 느끼지 못한다면 당신은 이미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사람이다.
제1회 북경 개인전에서 심업은 자유의 여신상을 쇳덩어리로 만들었다. 쇠는 근대이다. 심업의 작품 세계에서 쇠는 한 편에서 다른 한 편을 공격하는 무기였을 뿐이다. 여기서는 메시지와 메시지 사이의 충돌을 부러 조장하면서 이데올로기적 승리를 도모하였다. 하지만 재료가 주는 한계를 넘기에 의식의 교감은 매우 더디었다. 거기서 심업은 극적으로 재료의 전환을 시도해버린다.
뽕뽕이로 만들어진 자유의 여신상. 메시지는 사라지고 존재성도 용해되어 버렸다. 유령처럼 존재한다.?(*“물이 거품을 가지고 있듯이 대지는 거품을 가지고 있구나”(「맥베스」 1막 3장) 이 구절에 대해서 레비나스는 말합니다: “귀신들과 유령들과 마녀들은 셰익스피어가 그의 시대에게 바치는 증정물 혹은 그가 사용한 연극적 장치의 잔해만이 아니다. (그 이상으로) 유령들은 (그가) 존재와 무의 한계 위에서 부단히 움직일 수 있도록 해준다. 존재와 무의 이 한계에서 존재는, 마치 ‘대지의 거품’처럼 무 자체 속으로 스며들어간다.”(레비나스 저, 서동욱역, 『존재에서 존재자로』제101쪽). 또?이 부분에 대해 서동욱은 다음과 같은 역주를 달고 있다: 여기서 거품은 유령적인 성격을 가진 마녀들을 가리킨다. “이들(마녀들)이 바로 거품이다”(「맥베스」). 레비나스는 유령, 마녀 등을 존재자가 아님에도 존재하는 것, 즉 존재자 없는 존재, 있음으로 본다. 레비나스가 본문에서 말했듯 ‘무 자체 속으로 스며든 거품’으로서의 마녀는 존재자(대지)도 아니요 무도 아닌 것, 즉 존재자 없는 존재, 있음이다. 대지 속의 거품이란 본성상 대지도 아니며, 그렇다고 대지 아닌 것(무)도 아닌 그런 애매한 성격의 존재(존재자 없는 존재)인 것이다.…여기서 필자가 사용하는 유령 개념은 서동욱과 레비나스의 생각을 기초로 한 것이다.)
뽕뽕이로 만들면서 자유의 여신상은 반성의 표현을 멈추지 못하고 스스로 존재를 포기한 채, 유령의 세계로 혹은 가유(假有)로 진입해버린다. 작가는 자유의 여신상에 대해서 직접 소리 지르지 않아도 그것 스스로 자신의 존재에 대한 반성을 이끌어 내는 힘을 만들어 주었다. 뽕뽕이가 주는 무화(無化)의 관계성이 아니라면 생산될 수 없었을 효과이리라.
작품이 작가가 부여하는 존재성에 사로잡혀 우뚝 서 있다면 이는 고립이거나 폭력이다. 누가 누구를 지배한단 말인가. 강요하거나 가르치거나 계몽하려 들지 말라. 너의 존재 상태에 공간을 마련해 준다면 거기서 타자들은 마음껏 교감하고 관계를 만들어낸다. 사실 이것은 예술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일이다. 어떤 것이 실체로 존재하지 않고, 관계로 존재한다는 것은 스스로 경계가 되면서 탄성을 산출하기도 하지만 타자를 맞이할 공간을 마련해준다는 의미에서 매우 관용적이다. 이 ‘관용’은 타자가 자신의 작품 세계로 들어와 교감을 생산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작품이 하나의 메시지로 고착되어 남지 않고 존재성을 교차적으로 소유하여 작품과 감상자가 동시에 재탄생하는 결과를 남기게 된다. 작품이 스스로 ‘경계적’ 존재로 존재한다는 것은 유동적이라는 뜻이자 살아있다는 뜻이다. 소멸과 탄생이 한 작품 안에서 동시에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작품이 단순한 재료의 덩어리가 아니라 생기를 부여받았다는 말이 된다.
심업의 작품을 구성하는 뽕뽕이는 작품 자체에 경계적 탄성을 갖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람자를 대하는 작품이나 작품을 마주하는 관람자 양편 모두에게 구획의 선을 넘어 상호 초대하는 효과를 만들어냈다. 명사로 굳어가는 인간을 동사로 일깨워주는 것이 예술이 해야 할 하나의 역할이라면 뽕뽕이는 자체의 존재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이미 예술적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다. 그래서 작품은 스스로 예술이 되고, 관람자는 예술가가 될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경계적 관계성에서 오는 탄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느낌인지 붙잡고 싶다면 갤러리나 작가의 저지가 있다 하더라도 한 번 쯤 거친 관람자가 되어 작품을 직접 만져보기 바란다.
특히 핑크색 ‘뽕뽕이’천을 두른 ‘소녀상’의 엉덩이를 만져보자. 인류의 피부가 아직까지 제공하지 못했던 촉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이 아마 우리가 인간 이전부터 느끼고 싶어했던 사실은 ‘진짜 촉감’이었는지 모른다. 피부를 통해서 서로가 부단한 창조 과정으로 빠져드는 활동! 그 활동이 만들어주는 촉감은 단순히 축감이 아니라 당신 영혼의 한 조각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다. 사타구니 쪽을 만지면 그 감각은 더욱 강렬하다. 경계에 서야 그렇게 강렬해진다. 그것이 ‘관계’의 힘이다.
‘뽕뽕이 자유의 여신상’은 작가의 ‘오만함’
작가로 하여금 ‘뽕뽕이’를 표현의 수단으로 맞이하게 한 것은 그의 깊은 사려나 고려가 아니라 순전히 “의리는 있으나 주의가 산만하고 난폭”하였던 성정을 고치려 하지 않았던 ‘오만함’이었다. 확실히 예술은 ‘계산’을 넘어서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