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의 경제토크] 김대기 전 수석이 본 ‘덫에 걸린 한국경제’
이명박 정부에서 청와대 경제수석과 정책실장을 지낸 김대기씨의 ‘덫에 걸린 한국경제’를 읽었다. 책이 아주 쉽게 쓰여졌다. 복잡한 이슈를 축약하여 몇백개 단어로 정리하고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다음 이슈로 넘어가기를 계속한다. 저자의 높은 무공이 돋보인다. 거기에다 자신의 경험담으로 양념을 쳐서 읽기가 전혀 지겹지 않다.
좁은 한국 사회에서 누군가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도 있는 잘못된 정책도 객관적인 입장에서 쿨 하게 썼다. 별로 화낼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느낌이 온다. 차분하게 논리적으로 썼는데 화를 내는 사람이 이상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보수 진보 어느 쪽의 편을 들지도 않으면서도 센시티브한 주제를 다루는 솜씨가 탁월하다. 몇몇 MB의 대표적인 경제정책에 관해서 핵심내부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내가 오해했던 몇가지를 바로 잡을 수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자.
1. 과거 한국의 경기를 엔고 엔저와 연결해서 서술하는 걸로 책은 시작한다. 이제는 위안화도 있고 해서 과거만큼 엔고 엔저와 한국 경기가 직접 관련 있지 않을 것 같은데, 요사이도 엔저 때문에 나라 경제를 걱정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나는 엔저로 한국 경기가 가라앉기 전에 일본 재정파탄이 먼저 발생한다고 생각하는 부류다.
2. 돈이 향락사업에 가지 못하도록 했더니, 수익성이 좋은 향락사업은 비싼 돈도 꿀 수 있으니 시중금리(제2금융권의 이자?)를 올려놓은 결과가 나왔다는 경험담은 참 재밌게 읽었다. 뭐든지 규제를 하면 가격이 오르기 마련이다.
3. 무료 의료보험으로 인한 도덕적 해이의 극치의 예를 보고 슬펐다. 1년에 40년치의 처방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선의의 정책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굉장히 많다. 꼭 집어서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인구의 절반 정도가 무료의료보험제도를 악용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책을 펴기 전에 악용 방지를 충분히 고려하고 의료보험 등을 속이는데 신고하는 사람을 포상하는 것은 어떨지 모르겠다.
4. 정부가 개입하여 가격구조를 왜곡하여 일어난 부작용의 예를 상당히 많이 들고 있다. 밀턴 프리드만의 ‘Free to Choose’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론도 돈으로 주어서 해결할 일을 이런 저런 정책으로 지원하면 부작용이 많다는 것으로 동일하지만, 저자의 주장이 명석하고 한국적 상황에 관한 전반적인 고찰이라는 점에서 이 책이 훨씬 낫다. 저자는 요새 학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이런 내용의 책을 한 권만 더 출간하면 한국의 밀턴 프리드만이라는 평판을 받게 될 듯 하다.
5. 반값등록금이 청년실업을 늘린다는 내용이 나온다. 등록금이 싸니 대학에 가지 말아야 되는 사람이 가고, 그 사람들은 좋은 직장만 찾고…이런 현상을 지적하는 것인데 필자는 저자와 생각이 다르다. 반값등록금을 그 학과 졸업생의 취업률과 연동시키면 된다고 본다. 졸업해도 취직이 안 되는 곳에는 반값등록금의 특혜를 줄 필요도 없고 졸업하기만 하면 취직이 다 되는 학과는 반값등록금이 적용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해야 학과 정리가 빨리 된다. 발전시킬 학과는 빨리 크고, 없앨 학과는 빨리 줄고 말이다.
6. 저축은행 사태에 관해 저자는 “시장에 맡겨야 된다”가 아니라 “금융감독을 더욱 강화했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어떤 것은 시장에 맡겨야 되고 어떤 것은 관리 감독을 더 강화해야 하는지를 어떻게 판단하는가가 경제정책 담당자의 최고의 숙제이리라. 필자가 보기에 이론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고, 저자처럼 오랜 경험에 의한 정책판단능력이 있어야 하는 사항이 아닌가 싶다. 전체 시스템의 붕괴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는 금융산업 같은 곳에서는 관리 감독이 어느 정도 있어야겠지만 저축은행이 망한 것은 필자가 보기엔 시장기능이 상당히 잘 작동한 것이 아닌가 싶다.
7. KTX와 인천공항 지분매각에 관해서 저자는 당시 정책담당자로서의 입장을 차분히 밝히고 있다. 정부와 민간이 조금만 더 소통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정부가 51% 지분을 유지한다는 것이 민간에게는 강조가 되지 않았다. “누구의 아들이 맥쿼리에 일했는데, 거기다 팔아넘길 것”이라거나 “누구가 외국에 돈을 가지고 있어서 마치 외국회사처럼 보이면서 국내 알짜기업을 다 인수하려 한다”같은 의혹과 소문들이 난무했다. 노무현 정부였으면 욕을 안 먹을 일들이 이명박 정부여서 욕을 먹는 것도 아이러니 같다.
이 책에서 저자는 산업은행 민영화는 반대하고 있다. 어떤 것은 민영화하고 어떤 것은 국영으로 남겨두고 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다음에는 저자가 그 문제를 집중해서 파고 들어주었으면 싶다. 그리고 민간에게 어느 정도 메리트가 있어야 사는 사람이 있는 법인데, 정부에게 유리하게만 하면 살 사람이 없어서 민영화가 아예 원천적으로 어렵다. 정부는 털고 싶고 민간은 사고 싶고 이래야 딜이 되는데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는 팔리지도 않을 것을 가지고 민영화를 논의하는 것은 시간낭비다. 정부에 좋은 민영화는 그걸 살 민간기업이 나서질 않는다. 참 어려운 문제다.
8. 우리나라 재정건전성이 아직은 괜찮은 것 같은데 곧 위험 존으로 들어갈 것 같다는 인상을 이 책에서 받았다. 공기업부채가 포함되는가 하는 문제도 있어서 민영화하면 공기업부채도 터는 것이니 그것이 좋은 점이기도 하겠다. 필자가 보기엔 GDP의 60%가 국가채무의 실질적인 상한선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공기업의 채무가 어떤 식으로 포함되는가가 이미 넘었는가 아닌가의 핵심이 되겠다.
9. 지방재정 문제는 현재 우리나라의 3대 뇌관중의 하나라고 본다. 아시안게임이 끝날 즈음에 이 책을 자세히 읽었는데, 감회가 더욱 새로웠다.
10. ‘경제관료의 무력화’라는 챕터는 안타까워하면서 읽었다. 사실 경제공무원이 눈부신 시절이 있었는데 대통령의 의지의 문제라고 본다.
11. 요즘 뜨고 있는 신흥국들에의 진출이 우리의 블루오션이라는 것을 확실히 제시해 주고 있다. 필자도 저자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일본인이나 중국인들이 별로 잘 활용하지 못하는 것 같다. 현지인과 쉽게 친해지는 한국인의 붙임성이 큰 자원이다.
12. 언론의 부정확한 보도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정확하지 못한 보도는 모든 국가의 암이다. 보수언론도 진보언론도 참 답답한 면이 많다. 답은 ‘토론문화’라고 본다. 우리나라는 토론이 미국 유명대학 입학을 위해 스펙을 하나 더하는 그런 면이 있다. 어느 정책이든 정부정책을 옹호하겠다면서 보수언론/진보언론이 나서면 그때부턴 무조건 반대가 극한으로 치닫는다. 반대가 있으면 차분히 정부가 설득하면 될 것을 옹호한다면서 친정권 언론이 나선다. 그러면 그 언론사의 과거 왜곡행적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 언론들이 나서는 것 보니 뭐가 구린 게 있구나” 이렇게 여기게 된다. 광우병 파동때도, “미국교포들은 먹고 잘만 살구먼”이라고 논설을 보수언론의 누군가가 썼는데, 읽다가 분통이 터졌다. 중국교포들이 먹는 중국불량식품에 대해서는 같은 말을 하지 못하면서 “미국교포들이 먹고 있으니 광우병은 안심하시요”라는 논리같은 것은 보수정권의 정책에 보수언론이 나서니 그것이 이데올로기적 쟁점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 언론의 패악질, 정말 지겹다. 그렇다고 언론의 자유를 침해할 수도 없고, 여러 대안 언론들이 있어야겠다.
13. 저자는 스웨덴의 경험을 잘 요약하고 있다. 진보정권이 보수정책을, 보수정권이 진보정책을 추진하면 오히려 추진이쉬운 것이 아이러니다. 비스마르크 치하의 독일, 대동아전쟁당시의 일본이 현대복지정책을 본격적으로 시행했다. 스웨덴 진보정권이 오래 집권하며 보수정책을 밀어부치니 뭔가 그림이 되는 것 같다. 앞으로 우리나라 위정자들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박근혜 후보가 경제민주화와 복지라는 화두를 선점하고 김종인 같은 분을 대선때 활용해 선거에 이긴 것도 그런 맥락에서 파악하면 이해가 된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추진하고, 진보정부가 들어서면 재벌지원, 규제해제 등을 추진했으면 뭔가 되었을 것 같다. 경제정책과 좌우 정권의 묘한 하모니 말이다.
14.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표현은 “~해서 아쉽다”다. 저자의 절제된 담담한 감정억제 능력이 보여지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