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의 경제토크] 맹자가 이땅에 다시 나타난다면
맹자의 편에 나오는 ‘진인사대천명’이 있다. “만사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가르침은 성경에도 “하늘나라가 너의 속에 있으니라”는 가르침이 있다. 자기 마음을 닦는 사람은 거대한 새 우주 속으로 여행을 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존재만큼 신기하고 기기묘묘하고 알 수 없는 존재가 없다.
용서하라는 가르침도 여기 나온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참 안 좋은 거다. 이성적으로, 계산적으로 생각해봐도, 서로 용서하는 것이 내게는 득이 된다. 그런데 나는 용서받고, 나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려 하지 않는다. 정부는 시장에서 탈락한 자를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 시장에서의 승자는 정부가 특별히 더 보호해 줄 필요는 없다. 우리나라의 보수층이 들으면 펄쩍 뛸 이야기다.
돈을 벌거나 출세를 했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더 벌려고 하고 계속해서 더 출세하려고 해야 건강한 것이다. 물론 늘 감사해 하면서 말이다. 감사와 만족과 동시에 공격적인 태도를 견지해야 된다는 거다. 늘 감사하지도 않고, 공격적인 확장도 하지 않는 태도는 쾌락과 쇠락과 패망의 길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런데 공격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전제가 된다. 뭔가 알고 있어야 공격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다. 물론 그냥 마구 뛰어다니는 것은 공격적이라고 하지 않고, 우왕좌왕이라고 한다.
크게 되었는데도, 겸손하면서 감사해 하면서 여전히 공격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면 엄청난 공부를 하고 있는 훌륭한 사람의 특징이다. 그런 사람은 도덕적으로 해이해지지 않는다. 이 세계를 해석하는 관점이 자꾸 그 다음 차원, 그 다음 차원 식으로 더 깊이 넘어감을 의미한다. 그러지 않으면 계속 공격적일 수 없다. 가끔 재벌 회장들이 ‘공격경영’을 언급하는데, 이건 좀 다른 이야기다.
지도자가 원래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고 노력하다가 불가피하게 백성을 수고스럽게 하더라도 백성이 원망을 하지 않는다. 살리려고 노력하다가 할 수 없이 죽이게 되어도 원망하지 않는다. 평소의 평판이 그만큼 중요하다. 죽이기를 즐겨한다는 평판이 있으면 어렵게 살려주어도, 공범들과 다 함께 죽이기 위해 잠시 풀어주었다고 의심한다. 쓸데없이 백성을 괴롭히지 않는 풀어놓기를 즐기는 중국의 오래된 지도자의 습관은 여기서 나왔다.
필요 없이 백성을 괴롭히는 것이 기강을 잡는 것이고 그것이 정치 잘하는 줄 아는 일본 정치인들의 습성은 참 좋지 않다. 언뜻 보기엔 중국 국민들이 난잡하고 공중도덕이 없는 것 같은 반면, 일본 백성들이 공중도덕이 확실한 듯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 이면에는 이런 깊은 사연이 있다.
북한 주민들에게 자신의 정부에 관해 물어보면, “지상천국이예요. 너무 좋아요. 수령님 은혜로…”등의 말을 하지만, 북유럽의 국민들에게 물어보면 대답도 안 한다. 후자가 더 좋은 정부다. “의인에게는 고난이 많으리니…”라는 성경구절과 완전히 동일하다.
은퇴한 인재들이 돌아오도록 하자는 것은 세상을 등진 유능하고 철학적인 노인들이 “그분이라면…” 하면서 그 휘하에 모이는 정도의 매력적인 정치인을 묘사하고 있다. 노인들이 소외된 것이 아니라 특정사회에 잘 융합되어 있으면 그 사회의 기본구성이 튼튼한 것을 의미한다. 육아문제, 복지문제,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다.
나는 대가족제도가 어느 사회든지 모든 경제문제 복지문제의 궁극적인 답이라고 본다. 모든 사람이 자기 집을 소유하면 (그러기 위해서 큰 빚을 지면) 정치적으로 보수화하고 그래서 안정된다고 말하는 정치학자들이 많았다. 핵가족제도가 번지면서 주택수요가 엄청나게 늘었다. 부동산 버블이 전 세계적으로 형성되었다. 요사이 거의 모든 경제문제가 바로 그런 사고방식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자산가치가 높은 사회가 아니라, 가처분 소득이 풍부한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라는 가르침은 정말 중요한 가르침이다. 몇 조원씩 자산을 가진 사람도 허덕대고, 서민들은 당연히 더 허덕대는 것은 경제의 판을 처음부터 잘못 짜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수려한 문장으로 자기 생각을 표현할 줄 알아야 진정한 군자다. 자본주의 하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우리는 도척(도척은 유학의 가르침 속에 신약성경의 유다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악인이지만 가끔 악하면서도 열심히 사는 귀여운 존재로 등장한다)의 제자다.
아침에 일어나서 무슨 생각을 하는가? 나는 돈을 어떻게 하면 더 벌까를 생각한다. 아니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오늘 내가 뭔가 조치하지 않으면 터질 사고들을 걱정한다. 반면, 천하에 무엇이 득이 되는가를 생각하는 그런 멋진 생활을 언젠가 나도 해보고 싶다. 그렇다고 너무 지나치게 박애주의로만 나가는 것도 옳은 일이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다. 중용이 중요하다. 생각해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가르침 말이다. 그러나 맹자 속에는 그런 상식적인 가르침이 탄복할 만하게 지혜롭게 압축 정리되어 있다.
맹자는 “자격이 없는 군주를 내치는 것”을 자주 이야기하는데, 그것도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군주가 제 정신을 차리면 다시 제 자리에 돌려놓을 정도로 애정이 기본으로 깔려있어야 한다는 거다. 그런 이야기는 상상속의 환상일 뿐이다. 세상에 그런 케이스가 어디 있겠는가? 군주가 돌아와서 저번에 내쫓은 사람들을 9족을 멸할 텐데 말이다. 정치가 애들 장난인가. 군주를 내치면 그 군주가 그냥 나가겠는가. “나중에 다시 부를께요. 그러니 너무 화내시지 마시고 조용히 사라져 주셔요.” 이런 걸 믿는 군주, 그런 멍텅구리 군주라면 사실 진작에 내쳐야 한다.
다시 부른다 하자, 그럼 그때 군주를 하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냐는 문제가 있다. 선거라면 좀 이해가 된다. 이번에는 나오지 마시고, 한 임기 쉬시고 차차차기 대권에 도전하셔요. 이런 식으로야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다. 그런 상황이 아니고는 이야기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군자는 존재감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것이지 꼭 무슨 노동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가치, 어떤 사상을 상징하는 인물이 어떤 자리에 있으면 되는 것이지, 그 인물이 꼭 어떤 노동/작업/목표달성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경제민주화를 상징하는 김종인이란 인물이 대선캠프의 선대위원장인 것이 중요한 것이지, 그 사람이 실제로 선거운동에 발로 뛸 필요는 없다.
재미난 구절 하나 소개한다. “순임금의 (문제 많았던) 아버지가 살인을 하면, 순임금의 부하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그리고 순임금이 어떻게 할 것 같은가” 하는 질문이다,
부하는 당연히 순임금의 아버지를 체포해 의법처리할 뿐이고, 순임금은 아마 천하를 버리고 아버지를 업고 도망갔을 것이라고 맹자는 재치있게 답한다. 아무리 문제가 있는 아버지라도 아들이 아버지를 고발한다거나 하는 그런 일은 인륜에 어긋난다.
우리나라에는 형사소송법상 가족이 다른 가족의 범죄를 고발을 하거나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아도 처벌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있다고 들었다. 아직 유교적인 전통이 남아있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아버지를 고발하는 아들을 칭찬하는 작태는 공산주의가 원천적으로 비인륜적인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전혀 건강한 풍토는 아니다.
3년상을 1년상으로 줄이는 것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그나마 낫지 아니한가라는 질문에, 이래저래 마음의 문제인데 하기 싫으면 안하는 것이지 1년을 한다고 해서 아닌 것이 그런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고 답을 한다. 자기들끼리 단순한 이익 때문에 싸우면서, 같잖은 명분을 동원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인자무적’이란 말의 출처가 바로 여기다. 어느 특정인물이 곧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한 바 그것이 맞아 떨어졌다. 그렇다. 주위에 가만히 보면, “저놈의 비참한 말로가 가깝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들이 있다. 실낱같은 아무것도 아닌 권력이나 재력에 의지해서 모든 사람에게 교만한 케이스들 말이다.
예전에 어느 특정 장관으로부터 특별한 신임을 받던 한 사무관이 국장이나 차관보 등에게 거의 반말로 지껄이는 것을 봤는데, 그때 내 마음속에 “아, 저 사람 오래 못가겠구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도박을 크게 하다 공금을 유용하여 인생을 마쳤다. 요사이 정수기 장사를 한다고 들었다. 그때 그 특정 장관에게 그 사무관이 바치던 충성과 아부는 정말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난 그때 “아. 저래야 출세를 하는구나, 나는 공무원 체질은 아닌 것 같다”라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