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구의 필리핀바로알기] 장유유서 문화 속 어린이·여성은 존중해줘
필리핀도 연장자에 대한 예우문화가 있다. 따갈로그어에도 대화중에 ‘PO’라는 존칭어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연장자에게 쓰곤 한다. 그러나 노인이나 직책이 아주 높은 사람이 아니고는 그런 존칭을 받는 것을 꺼려한다. 격식은 친근감이 없다는 것이다. 필자가 아는 어느 필리핀 변호사는 20여년 전 나이가 70이 넘어 처음 만났는데 필자를 포함해 그보다 나이 어린 사람들이 ‘Kuya’라고 불러주면 좋아했다. ‘형’ 또는 ‘오빠’라는 뜻이다. ‘변호사님’ 또는 ‘Sir!’라고 호칭하면 딱딱하고 정이 없다고 싫어하였다. 현재 90세가 넘어서까지 장수하며 생존해 계시는데, 아직도 인척이 아닌 주위 사람들은 모두가 그를 ‘Kuya’라고 부르며 좋아한다.
호칭이 가볍다 하여 남들이 그를 가볍게 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를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형제나 사촌 간에도 나이와 서열을 따져 권위를 내세우려 하지 않고 거의 ‘친구’처럼 서로를 존중하며 격의 없이 지낸다. 한국사람들 시각으로는 나이 어린 동생이 형들에게 무례하지 않나, 또는 형들이 너무 나약하지 않나 하고 오해할 정도로 친하다. ‘예(禮)’는 차등적 질서를 유지하는 버팀목이라 일컬어지는데, 필리핀 사회에도 ‘예’가 있으나 한국사회만큼 경직되어 있지 않고, 특히 가족과 친척을 포함한 친근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차등적 질서’를 따르지 않더라도 그들 사이에 아무런 갈등이 생기지 않는 것을 자주 경험한다.
사람 사이에 예가 있다는 말은 ‘사람이 차이를 넘어서 상호 간에 존중해야 할 존재로 거듭나야 함’을 일컫는다 하는데, 상호존중은 언제나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먼저 존중하고, 어른이 아이들을 먼저 존중하고,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먼저 존중하고, 기득권층이 비기득권층을 먼저 존중함으로써 보다 수월하게 상대로부터의 존중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기가 아래로부터 위로 끌고 올라가기보다 훨씬 쉽고 자연스러운 것이 자연의 섭리이다.
필리핀 사회에도 장유유서(長幼有序)의 문화가 있다. 그러나 한국과는 반대로 (노인인 경우만 제외하고는) 항상 애들과 여자들이 우선이다. 식사할 때에도 애들과 여자들 또는 허기진 사람들이 먼저 먹도록 배려한다. 약자들이 먼저 배불리 먹고 난 뒤에 강자들이 수저를 드는 것이, 서로를 사랑하는 가족과 같은 사회, 복음주의 사회, 평등(좌파적, 보수적)사회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필리핀의 서민사회에서 늘상 있는 일이다.
역설적으로, 호칭에 민감한 사람들을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항상 호칭이 정중하고 격식과 예에 맞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이 가볍게 호칭한다면 당신을 가볍고 하찮게 여긴다는 뜻일 수 있기 때문에 당신과의 약속, 계약, 거래 등을 (중하지 않고) 가벼이 여길 것이며, 당신이 그들로부터 상처를 받더라도 (가벼운 상대의 상처에는) 하찮게 여길 것이다.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호칭(존칭)문제로 다투는 경우가 아주 많다. 처음 만나는 사이에는 (특히 남자들 사이에서)누가 나이가 많은지, 직책은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등을 우선 신경 쓴다. 나이의 많고 적음에 따라 서열을 정해 존대어를 써야 하고 존중받아야 하고 어떤 사람은 권위까지 챙기려 든다. 한국사람은 시끄럽게 싸우는 것을 빗대어 ‘불난 호떡집 같다’고 하지만, 중국 사람들은 ‘제삿날 조선집 같다’고 한다. 제삿집마다 격식과 서열 문제로 싸우지 않는 집이 없다는 것이다. 격식과 서열을 따지고 의전을 중요시하는 사회로는 관료 사회와 권위주의 사회가 더욱 지독하다.
거기에다 천민자본주의까지 보태어져서 나이가 많고 지위가 높은데다 재산까지 많으면 그야말로 가관이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재물이 가장 중요시되고 다음이 지위, 그 다음이 나이인 것으로 보인다. 나이가 적더라도 재산이 아주 많거나 지위가 상당히 높으면 존대어를 써야하고, 존중을 해줘야 하며 권위를 인정해줘야 한다. 재벌 가문의 젊은 자녀들이 나이 많고 경험이 많은 임직원들에게 회의석상에서 반말로 호칭하고 호통 치는데 임직원들이 (마음속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반발하지 않고 인정해주는 경우들이 그러하다.
원청업체의 젊은 직원들이 나이 많은 하청업체의 직원들을 하대하고 함부로 호통 치는 경우들도 그러하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천박한 노랫말이 60년대, 70년대에 유행했는데, 그 당시는 가난을 벗어나는 게 최우선이었기에 출세하여 억울하지 않기 위해 아마도 영혼마저도 팔아야 했었는지 모른다.
“(가난한) 서민에게 좀 잘해줬더니 내가 지네들하고 동격인 줄 착각하고 무척 친한 척 행동하더라”며 불쾌해 하거나, “나이도 어린 게 건방지게 항상 친구(friend)라면서 나를 소개하고 다닌다”라거나, 심지어 길을 물어보면서 가난한 서민에게 존대어(“Sir” 또는 “Madam”)를 썼더니 “왜 거지같은 사람들에게 깍듯이 존대하느냐, 자존심도 없느냐”라는 핀잔을 하는 사람도 있다. 필리핀 서민들이 60년대, 70년대의 한국과 비슷한 생활수준이라 하여, 6070세대들이 일부 부자 동족들로부터 받았던 천박한 인식-억울하면 출세하라-으로 필리핀 서민들을 대한다면 혐한 분위기가 확산될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겸손은 나이와 재산의 많고 적음과, 지위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남을 무시하지 않으며,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많이 알고 있거나, 자세히 알고 있거나, 조금이라도 재능이 많은 사람을 망설임 없이 인정해 주고 존대해 주는 것이고, 그 사람의 의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겸손할 줄 모르는 사람은 언제나 남을 비난한다고 한다. 우리보다 필리핀 사회에 대해 조금은 더 잘 알고 있는 가정부, 운전수, 직원들, 이웃들로부터 매일 크고 작은 도움을 받으며 살고 있고, 한국인들은 필리핀이라는 남의 나라에 와서 터를 잡으려 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하겠다. 그런 만큼 필리핀 사람들을 비난하고 흉보더라도 주위에 필리핀 사람들이 없는 자리에서 해야 할 것이고 (눈치가 빨라서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자기들을 흉보는지 칭찬하는 지 알아챈다) 나이에 상관없이, 지위에 상관없이, 계층에 상관없이 겸허하게, 그러나 항상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무조건 존중해 주는 게 유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