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낙후사회’ 이미지 왜 못 벗나
[Country in Focus] 필리핀,?빈부격차 극심…생활수준은 ‘성장’보다 ‘분배’ 문제
필리핀은 남한보다 3배나 넓은 면적에 인구 1억 명이 넘는 큰 나라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잘사는 나라였다. 그런데 어째서 아직까지 ‘개도국’으로 불리는 것일까? 나는 크게 네 가지 이유를 꼽는다.
첫째, 식민지배자들의 기득권이 청산된 적 없이 계속 유지되고 있다. 무려 410여 년 식민지배(스페인지배 360년, 미국지배 50년) 동안 형성된 뿌리 깊은 귀족지배계층이 필리핀의 정치와 경제를 다스리고 있다. 스페인과 미국 덕택에 교육 받고 문명화됐다고 오히려 식민종주국에게 감사해 한다. 한국에서 을사오적(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의 아들, 딸, 손자, 손녀들, 그리고 그들의 추종 간신배들이 대통령, 장관, 시·도지사, 국회의원, 공기업·재벌기업 등을 대를 이어 또는 자기들끼리 돌아가면서 계속 해먹고 있다고 상상하면 된다. 그래서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고 친일파 재산을 국고에 귀속시켰으며 일제식민시대를 치욕으로 여기는 한국과 크게 비교된다.
둘째, 해마다 빈부 격차가 빠르게 벌어지고 있다. 내가 처음 필리핀에 발을 들여놓았던 1990년과 비교해 현재 물가는 10배 이상 치솟았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은 겨우 2배 정도 올랐을 뿐이다. 직원들에게 임금을 떼어주고 나머지를 모두 챙기는 지배계층의 실질소득은 물가상승률보다 훨씬 웃돌았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직장인을 포함한 서민 생활은 더욱 빈곤해졌고 중·상류층 생활은 더욱 윤택해졌다.
<포브스>가 발표한 갑부 명단을 보면, 2012년 필리핀 최고 부자 헨리 시(Henry Sy)의 재산은 80억 달러로 한국 최고 부자 이건희 삼성 회장의 83억 달러보다 약간 적었다. 그러나 2013년에는 역전돼 헨리 시의 재산은 132억 달러로 늘어 이건희 회장의 126억 달러보다 많아졌다. 필리핀 상류층 부의 축적속도와 서민층 빈곤화 속도가 한국보다 빠르다는 얘기다.
1970~2012년 43년 간 경제성장률을 비교해보면 한국은 연평균 6.7% 성장한 데 비해 필리핀은 한국의 절반 수준인 연평균 3.4% 성장률을 보였다. 만약 두 나라 분배시스템이 비슷했다면 필리핀 상위층 생활수준은 한국 상위층 생활수준의 절반 수준, 필리핀 서민들의 생활수준은 한국 서민 생활수준의 절반 정도여야 합당하다.
그러나 두 나라 상위층 1000만 명(한국의 상위 20%, 필리핀의 상위 10%)은 비슷한 소득과 생활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필리핀 서민 9000만 명(하위 90%)의 생활수준은 한국 서민 4000만 명(하위 80%) 생활수준의 6분의 1 이하로 턱없이 낮다. 필리핀 경제도 한국의 절반 수준으로 꾸준히 성장했지만 분배에서 한국 상위층보다 필리핀 상위층이 거의 2배의 배분율을 취해왔고, 필리핀 서민층은 한국 서민층보다 6배나 적은 배분율을 받아왔다고 추정할 수 있다. 필리핀은 부를 공정·평등하게 나누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낙후사회’로 비치는 것이다.
셋째, 복지가 낙후돼 있다. 필리핀은 세금을 적게 거둬들이는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 중·상류층이 운영하는 기업을 간섭할 만한 법률·인력·재정 지원을 거의 하지 않는 ‘친기업 정책’을 유지한다. 그래서 자본이 우선시되는 ‘시장자유’와 ‘독점자유’ 정책들이 기세를 부리고 있다. 세입이 적어 정부재정이 부족하니 사회간접시설이나 사회불평등을 해소할 복지사업에 투자할 자금이 부족하다. 그래서 사회주의 정책인 사회보장제도, 공공교통시설, 공교육, 사회복지시설 등 ‘사회’와 ‘공공’ 단어가 들어가는 정책들이 뒤쳐져 있다.
넷째, 분배구조를 포함한 불공정·불공평 문제에 대해 국민의 90%인 서민 대다수가 분노할 줄 모른다. 또 분노하지 말고 착하게 살도록 학교, 언론, 종교 등이 훈육하고 설교한다. ‘착하다’는 말은 때로 ‘어리석다’ 또는 ‘고지식하다’는 의미를 갖는다. 국내외 기부단체, 구호·봉사단체가 서민들이 재난에 처할 때마다 신속하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긴 하지만 이는 단편적이고 일시적인 해결책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서민들이 현실의 모순에 분노하고 개혁하려는 의지를 삭여버림으로써 그 아름다운 활동이 결국 지배계층을 돕게 되고, 착한 서민으로 길들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저항 모르는 낙천·순종적 서민들
2013년 11월7일 밤 필리핀 중부 태평양 연안 마을과 도시들을 강타한 태풍 하이옌으로 6000여 명의 사상자와 실종자, 수십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정부와 지배층이 충분히 대비했다면 그렇게까지 대형재난으로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태풍이 필리핀 마을을 강타하기 하루 전까지도 2005년 미국을 강타했던 허리케인 ‘카트리나’ 보다 세며, 필리핀 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태풍임을 보도하고 주의만 당부했을 뿐, 매년 태풍때마다 대피했던 곳보다 더 안전한 대피장소를 마련하거나 안내하지 않았다.
강풍과 해일이 해안 마을과 도시들을 휩쓴 며칠 뒤 정부와 지배층은 서민들에게 전염병과 도둑, 강도의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는 피해지역에서 벗어나 다른 도시의 친척집으로 각자 알아서 살 길을 찾으라고 안내했다.
하이옌으로 파괴된 재난지역 이재민 수만 명이 대책 없이 수도권으로 유입됐다. 그들을 체계적으로 지원·보호할 복지시설이 없으니 이재민 상당수가 범죄자나 부랑자가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래서 이재민과 그들을 안타까워하는 서민들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지배층의 배려는 예년에 비해 조용하고 검소하게 치러진 크리스마스 축제로 나타났다. 명예에 목말라있는 일부 기부주의자들과 봉사주의자들은 물과 전기와 교통·통신 수단이 끊겨버린 피해지역을 방문해 구호물품을 전달하고 폐허로 변해버린 마을과 처참한 몰골의 생존자들을 배경으로 얼굴 알리기용 사진찍기에 바빴다.
태풍 하이옌이 강타한 지 열흘 뒤 천재지변이든, 지배층의 무관심과 무책임이든 어떤 역경에 처하더라도 서민들이 착하게 순화된 정신을 유지하도록 이끌어야 하는 언론과 종교는 주요 일간지에 다음과 같은 헤드라인을 뽑았다. “Faith Stronger than Storm.”(신념은 태풍보다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