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구의 필리핀바로알기] 의리? 돈으로 묶인 계약관계일 뿐!

필리핀 사회에서 ‘의리’란 어떤 형태인지, 한국인과의 인식 차이는 어떠한지 필자의 경험과 생각은 이러하다. 예를 들어 A와 B가 하나의 아이템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는데 C가 결정권을 쥐고 있다고 하자. A와 C는 평소에 식사와 술자리에 자주 어울려 다니는데, B는 C를 잘 알지 못한다. 사업자를 선정해야 하는 시기가 왔을 때 A는 C에게 100만원을 사례금으로 준다 하고 B는 200만 원을 준다 하면, 필리핀 사회의 상식으로 C는 B의 손을 들어준다. 그리고는 A를 비난한다. B는 200만원을 주고서도 사업을 할 수 있다고 하는데, 당신(A)는 100만원밖에 주지 않으려 했다는 것은, 나(C)와의 평소 친분을 이용하여 당신(A)이 보다 많은 이득을 차지하려 했던 것으로 간주되니 괘씸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필리핀에서 사업을 할 때에는 평소에 누군가에게 접대를 하고 자주 어울려 다니는 것보다는, 결정적인 순간에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경쟁자보다 많이 오퍼하면 성공의 확률이 높다.

<명심보감>에 “열매 맺지 않는 과일나무는 심을 필요가 없고, 의리 없는 벗은 사귈 필요가 없다”는 말이 있다. 한국인의 개념상으로 필리핀의 사업가나 공무원들은 의리가 없다. 그러므로 훗날을 대비하여 이들에게 미리 접대해 두는 것은 거의 헛되고 무의미 하므로, 의리 없는 벗은 평소에 사귈 필요 없이 지내다가, 사안별로 그들의 도움이 필요한 가장 적절한 시기를 포착하여, 그들이 흡족할만한 이익을 경쟁자들보다 많이 주어 목적한 바를 획득하는 게 현명할 것이다.

수십년간 거래를 하고 있는 거래처(하청 업체)가 있다 하더라도, 비슷한 품질에 보다 낮은 가격을 오퍼하거나, 월등한 품질에 비슷한 가격을 제시하면 언제든지 거래처를 바꿔버리는 게 필리핀의 기업 문화이다. 한국인들은 어느 회사와 처음 거래를 하고자 할 때에 보통 브로커를 찾거나 담당자와 안면이 있어서 다리를 놓아줄 사람을 먼저 찾아다니는데, 필리핀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모든 회사들이 현재의 거래처보다 유리한 조건의 하청 업체(공급처)를 항상 기다리고 있기에 만일 누구라도 품질이나 가격에 경쟁력이 있다고 자신한다면, 직접 그 회사를 찾아가면 담당자가 만나 준다.

‘수년 (또는 수십년)동안 거래해 온 공급업체가 있으니 쉽게 바꾸려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이 한국인의 정서인데, 필리핀의 사업가들은 자기들에게 보다 많은 이득을 줄 수 있는 업체로 언제든지 바꿀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필리핀 사람들은 ‘의리’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데, 필리핀과 같은 자본주의 독재사회에서의 의리란, 사업자들끼리의 계약관계이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맺어지는 계약관계일 뿐이다. 즉 서로에게 만족할 만한 도움이 되지 못하는 순간 계약과 의리관계가 해지된다는 합리적인 논리이다. 합리적인 사업 관계 또는 인간관계가 냉정한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한국 사람들은 우정과 의리를 묶어서 인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오랫동안 거래를 해 왔었다면 친분이 쌓이고 그래서 우정이 형성된 것으로 간주되며, 만약 작은 이득을 위해 경쟁자와 계약을 함으로써 친구를 불행해지도록 하는 것은 우정을 깨뜨리는, 의리 없는 나쁜 사람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많다. 공자는 “이익을 놓고 의리를 생각하고, 위급한 시기에 목숨을 내놓고, 오랜 약속을 평생토록 잊지 않고 지킨다면 완성된 사람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고, <채근담>에는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고 하였듯이, 수백 년 동안 유교 사상에 세뇌되어 온 한국 사람들은 의리를 이익의 반대 개념으로 인식하고 있다.

돈이나 이익보다 인정(우정)을 우선시하는 다분히 동양적이고 유교적인 사고방식으로서의 ‘의리’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은, 필리핀의 지배층들과 사업가들은 서구적이고 자본주의적이며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적인 정보다는 돈과 이익을 우선시 한다는 것이다. 서로에게 만족스러운 도움이 되지 못하면 고용주와 직원간에 계약(의리)이 해지되고, 결혼(의리)이 파기되며, 거래(의리)가 깨어져야 함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의리에 대한 필리핀 지배층(사업가)들의 인식과 문화 차이 때문에, 필리핀에서 사업하려는 사람들은 아래와 같은 현실을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첫째, 필리핀에서는 사업을 시작하기가 한국에서보다 훨씬 수월하다. 품질과 가격에 경쟁력이 있으면 어느 업체하고든 그들의 기존 거래처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다. 브로커를 통하지 않고서도 담당자를 수월하게 만날 수 있다. 한국인이 직접 나서기 어색하다면, 필리핀 직원을 고용하여 담당자를 찾아 면담 약속을 하게 하면 된다. 기존의 공급 업체보다 경쟁력 있는 업체를 담당자는 항상 기다리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만나서 협상할 수 있다.

둘째, 이미 거래를 성사시켰다 하더라도 당신보다 더 경쟁력을 갖춘 업체가 나타나면 언제든지 거래처를 바꿔 버릴 수 있다. 담당자는 당신을 쉽게 만나 주었듯이 다른 업체들도 쉽게 만나 주고, 그들에게 보다 이익이 되는 업체로 쉽게 바꿔버린다. 즉, 거래를 성사시키기는 쉬워도 꾸준히 유지하기가 힘들다.

셋째, 공급 업체(하청 업체)들끼리 항상 경쟁하는 구조이고 한국식 의리가 무시되는 문화이기에, 지배층들의 이익은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확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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