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장유유서’ 문화가 ‘세월호 참사’ 키웠다

며칠 째 고국에서는 여객선 세월호의 참사로 인해 말들이 많다. 먼저 피해자들의 명복을 빈다.

사고 발생 후 가장 먼저 구명정을 타고 배를 떠나 생명을 부지한 선장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이곳 필리핀까지 우렁차게 들린다. 그리고 그에 대비되는 외국의 선장들에 대한 미담도 많이 들린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버큰헤드호의 선장과 타이타닉호의 선장이다. 1852년 버큰헤드호가 침몰하려는 순간 탈 자리가 부족한 구명정에는 여자와 어린이들을 먼저 태워 대피시키고 선장과 선원 및 군인들은 갑판에서 부동자세로 서서 난파된 배와 함께 풍랑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1912년 타이타닉호 역시 제한된 구명보트에는 여자와 어린이부터 승선했고, 어른들과 선장, 항해사, 기관사를 비롯한 승무원들은 단 한명도 구명보트에 타지 않았다.

동료나 부하선원, 승객들을 먼저 구하기위해 구명보트를 양보하고 바다에 뼈를 묻는 것은 마도로스(바다사나이)들의 오랜 전통이자 명예였으며 낭만이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선장은 왜 영국선장들과는 정반대의 행동을 했느냐고 욕한다. 왜 선장과 승무원들 그리고 어른들이 먼저 구명보트에 탔느냐고 욕한다. 다수의 부하사병들만 희생되었으나 구조현장을 곧바로 이탈해 버린 4년전 천암함의 함장을 욕하는 소리는 안들려 의아하긴 하지만…

나는 그 이유를 한국의 뿌리깊은 차별적 관습이자 유교의 기본적인 도덕지침인 삼강오륜, 특히 그 중에서도 장유유서에 있다고 본다. 장유유서, 즉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질서가 있어야 한다. 강자와 약자 사이에도 질서가 있어야 한다. 선배와 후배 사이에도,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 선장과 선원들 사이에서도, 선장과 승객들 사이에서도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삼강오륜의 도덕 지침인 것이다.

선장과 함장은 분명 학교와 군대에서 강자와 약자 및 장유에 질서가 있고 차별이 있다는 훈련과 세뇌를 받았을 것이다. 그가 다녔을 학교와 군대에서 훈련받는 모습이 어떠한지 상상해 보자. 4학년이나 고참이 가장 먼저 식사를 하고, 그 뒤 서열이 높은 순서로 식사를 한다. 1학년이나 신참은 식사 뿐만 아니라 단체 외출시에도 선배들과 고참들이 나가고 난 뒤 가장 늦게 나가야 한다. 좋은 일은 선배와 고참들이 가장 먼저, 나쁘고 궂은일은 후배와 신참이 가장 먼저 해야만 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학교와 군대에서 세뇌받고 훈련받는 장유유서다.

후배와 신참은 약자들이다. 그러나 약자들에 대한 배려는 눈꼽만치도 없다. 나이 한두 살 더 먹었다고, 하루 먼저 입대했다고 선배가 배려받고 존중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좀 더 늦게 태어나고 학교 늦게 입학했다고 선배나 고참들 앞에서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피력하는데 있어 자발적으로 자제하거나 위축되고 꺼려져야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후배들과 신참들은 선배들과 고참들을 위한 존재가 되고 노예가 되고 희생양이 되는 게 당연하다고 강요되고 세뇌당한다.

후배들과 신참들은 그러한 차별을 견디고 적응하여 고학년. 고참으로 진급해야만 성공한 인격자이고 강인한 리더, 훌륭한 지휘관이라고 세뇌당한다.

그리하여 몇 년 후, 그 후배들과 신참들은 선배가 되고 고참이 되어? 그들이 약자일 때 당했던 것과 똑같은, 때로는 더 지독한 차별을 그들의 후배들과 신참들에게 재현한다.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고 강자가 우선시 되는 문화와 전통은 이렇게 하여 수 십년, 수 백년 계속 유지된다. 세월호의 선장도 분명코 젊은시절 학교와 군대에서 강자와 약자사이에 질서와 차별이 존재한다는 장유유서? 훈련과 세뇌를 받았을 것이고 오랜 세월 배에서 하급 사관으로 일할 때도 장유유서 지침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더욱 견고해졌을 수도 있다.

고전영화를 감상하노라면 장유유서에 세뇌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을 만한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수백 수천의 부하 병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주인공격의 장군이 적의 장수와 맞짱을 뜨며 위험에 스스로를 노출시킨다. 그 주인공 장군은 졸병들 앞에서 객기를 부리는 것일까?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지휘관 윌리암은 위험한 백병전을 하러 맨 앞에서 적의 군대를 향해 돌진한다. 위험한 일은 부하장교들이나 병사들에게 앞장서라고 명령하면 될 터인데, 수백병의 졸병들 목숨보다, 수십명의 부하장교들 목숨보다 한명의 장군 목숨이 더 값어치 있을 것인데, 왜 그다지도 무모하고 값싸게 행동하는 것일까? 그 역시 부하들 앞에서 객기를 부리는 것일까? 버큰헤드호의 선장과 타이타닉호의 선장은 당시 세계 최강인 영국의 귀족계급으로서, 자기 한사람의 값어치가 1백명 이상의 여자와 어린아이들보다 못하다고 판단하여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그 역시 부하들 앞에서 객기를 부렸던 것일까?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에게 칭찬받고 싶어서 근사하게 차가운 물속에 목숨을 던졌을까? 그 당시 서양은 장유유서의 기본적인 도덕관념도 없는 무식하고 무모한 문화를 가진 사회였을까?

강자가 약자를 목숨을 바쳐서라도 보호하고 배려한다면 약자는 강자에게 충성으로 보답하며 믿고 따른다. 강약과 장유에 서열을 부여하되, 위험한 일과 힘든 일은 강자가 먼저 솔선수범하고, 수월하고 좋은일은 약자에게 양보하는 아름다운 차별을 행한다면 강자와 약자, 장유가 단결하여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선진국이 된다. 우리나라가 그렇게 변해야 한다.

그에 반해 강자가 유리하고 좋은 것을 우선적으로 가져가고는 약자에게 불공정과 차별을 참고 견디도록 세뇌하는 사회에서는, 불법과 폭력이 난무하고 낙담한 젊은이들의 비행문제도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는 후진국이 된다. 내가 24년째 살고 있는 필리핀이 딱 그 모양으로 변함이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일부 보수주의자들과 도덕주의자들은 이렇게 떠들어 댄다. “우리나라가 동방예의지국이라 칭송받아 온 근본에는 장유유서를 실천하는데 있다. 지금 세상이 바뀌어 윤리도덕이나 전통문화가 많이 퇴색되어 버렸고, 학교폭력문제나 청소년 비행문제들도 윤리. 도덕교육의 결여에서 비롯되었다. 손아랫사람이 어른을 배려하지 않는다. 음식을 가져와서 어른들께 먼저 드리지 않고, 어른이 수저를 든 후에 드는 기본적인 예의를 따르지 않고 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 기본인성이 형성되려면 장유유서 도덕지침을 재교육해야 한다.”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어느 도시의 시장이 강당에서 행사를 열었다. 남녀노소 시민 500여 명이 행사장을 가득 메웠고 환갑이 넘은 시장은 강당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행사 도중 강당에 큰 화재가 발생하였고, 하나 밖에 없는 비상구를 찾아 큰 혼잡이 벌어져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 도시에서 가장 신분이 높고 어른이기도 한 시장은 과연 보좌관들과 경비원들의 안내를 받아 제일 먼저 무사히 강당을 빠져 나갔을까? 아니면 보좌관들과 경비원들에게 지시하여 질서를 유지시킨 후 연약한 여자들과 청소년들부터 대피시키고 자신과 보좌관들 및 경비원들은 불길속에서 생을 마감했을까?

한 나라의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대통령이라면 또 어떻게 처신할까? 연약한 국민들을 먼저 구하기 위해 비상구를 양보하고 자신의 목숨은 스스럼없이 불길에 내놓을까?

자식을 죽여 부모를 살린다는 효행은 책에 오르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결코 입에 내지 않는다. 그것이 도덕주의자들이 믿는 천륜이다.

세월호의 선장은 그 배에서 가장 지위가 높고 연세도 환갑이 넘은 어른이다. 그러므로 도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자면 선장이 가장 먼저 구명보트에 타는것은 타당하다. 선장 다음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들과 어른들이 먼저 구조되어야 하고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은 양보해야 하는 게 삼강오륜과 장유유서의 아름다운 문화와 전통에 합당하다. 그러므로 선장은 비록 법률에 정해져 있는 벌을 받을 지언정, 장유유서의 도덕지침을 잘 따랐으니 도의적 책임은 없다 할 것이다.

그런데 세월호의 사고 이후 지난 며칠동안 선장을 칭찬하거나 옹호하거나 보호하려는 이가 한사람도 없이, 선장 혼자 외로이 온갖 수모를 당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장유유서를 신봉하고 있는 보수주의자들과 도덕주의자들은 모두 비겁한 이중인격자들이란 말인가?

이번 참사를 계기로 학교에서, 사회에서 그리고 군대에서 이제까지의 장유유서를 거꾸로 적용하여 여자와 어린이들과 약자들이 먼저 식사하고, 위험에서 먼저 구조되고, 우선적으로 배려받는 문화개혁이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부모라면 누구나 창피하게 여겨야 마땅한 심청전과 같이, 어른들을 위해 희생하는 아이들의 불행한 이야기들이 다시는 학생들의 교과서에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One comment

  1. 자식이 부모를 위해 희생한다는 이야기와 장유유서를 이어붙이는 건 무슨 되도 않는 논리입니까? 동양 어디에 아이들이 쌩판 모르는 어른을 위해 희생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까? 공자는 제자들에게 나라에 도리가 없으면 그 나라를 떠나라고 가르쳤습니다. 봉건적 질서와 유교를 혼동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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