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 칼럼] 인간은 이기적인가, 이타적인가
[나는 누구인가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본성’ 탐구
인간은 누구인가? 인간의 유전인자가 발견되기 전, 철학자와 신학자들은 인간을 모호한 개념들로 정의해 왔다. 하지만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 유전인자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후, 인문학자들은 인간본성을 탐구하기 위해 유전자연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최근 과학자들이 주도한 인간본성에 관한 연구는 인간을 종족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적자생존의 영웅으로만 해석한다. 인간은 정말 이기적인가? 인간은 자기 자신, 자신과 관계된 집단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동물인가? 과학은 인간이 이기적이며 그렇게 사는 것이 인간답다고 우리를 현혹하고 있다.
19세기 영국의 위대한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Alfred Tennyson, 1809~92)도 이런 인간본성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자신의 그리스도교 신앙이 과학의 발전으로 흔들리는 심정을 절친 아서 헨리 핼럼의 죽음을 기리며 시로 토로하였다. 이 시는 핼럼이 죽은 1833년부터 17년간 틈틈이 기록해 1850년 <인 메모리엄 A.H.H>라는 제목으로 발표한다. 그는 이미 자신이 맹목적으로 신봉해 온 신앙이 지질학, 생물학, 특히 진화론에 크게 흔들리자 ‘과연 이 세계는 신의 질서가 지배하는가 아니면 무자비한 자연의 투쟁인가?’라고 질문한다.
테니슨은 <인 메모리엄 A.H.H> 시구 56에서 외친다. “Who trusted God was love indeed. And love Creation’s final law. Tho’ Nature, red in tooth and claw. With ravine, shriek’d against his creed. (신은 진실로 사랑이었다고 누가 믿겠는가? 그리고 사랑이 창조의 마지막 법이었다고 누가 믿겠는가? 자연은 이빨과 발톱이 피로 물들고, 계곡에서는 인간의 신조를 아랑곳하지 않고 비명을 지르고 있다)” 이 시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산 지식인의 종교와 과학의 상반된 세계관에 대한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찰스 다윈은 1859년 <자연선택을 통한 종의 기원>을 출간하면서 테니슨의 <인 메모리엄 A.H.H> 시구 56에서 “Nature, red in tooth and claw”를 서문에 인용한다. 20세기 다윈의 추종자인 영국 옥스퍼드대학 교수 리차드 도킨스도 <이기적 유전자>에서 다시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모든 생물의 행동은 적자생존과 약육강식 원칙에서 시작한다고 주장한다. ‘적자생존’이란 문구는 다윈의 ‘자연선택’을 대체하는 용어로 영국 생물학자 허버트 스펜서가 <생물학의 원리>(1864)라는 책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다. 스펜서는 ‘적자생존’ 이론을 자연과학을 넘어 사회과학, 특히 경제이론에 접목시킨다.
다윈과 허버트 모두 모든 생물은 치열한 경쟁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적자만이 생존하는 잔인한 투쟁의 영원한?회로에 빠져있다고 생각했다. 다윈과 허버트의 과학이론은 사회과학과 인문학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다. 특히 적자생존 이론은 나치와 공산주의의 핵심사상으로 변질되고 19세기 말, 아니 오늘날까지 풍미하고 있는 ‘무자비한 자본주의’ 탄생을 촉진시켰다. 적자생존-약육강식에 의거한 자본주의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이며 혈연주의다. 특히 자본주의 경제 틀을 통해 대기업은 인간에게 별 필요 없는 물건을 생필품이라고 광고와 미디어를 통해 세뇌한다. ‘이기적 유전자’라는 개념은 거대한 시장경제를 당연한 진리로 받아들이게 하는 이데올로기로 그 덮개 아래 우리는 하루를 연명한다.
자유방임주의 경제이론에 의하면 강력하고 거대한 기업이 작고 연약한 회사들을 갈취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이들의 행위는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주장하는 자연이론에 의해 정당화된다. 다윈의 적자생존 이론은 당시 영국에서 소수집단의 욕심을 정당화하기 때문에 열렬히 수용되었다. 독일의 역사가 오스발트 슈펭글러는 <서구의 몰락>이란 책에서 “경제학을 생물학에 적용함으로 자연선택이 영국에서 진리로 수용되었다”고 기록한다. 그는 “자연선택은 자본주의 윤리와 맨체스터 경제학이라는 빅토리아 시대 ‘욕망의 철학’의 완벽한 표현이다”라고 개탄한다.
적자생존 이론, 경제로 확대 적용
실증주의 창시자이자 ‘이타주의’ 개념을 만들어낸 오귀스트 콩트(A. Comte, 1798~1857)는 자신이 그토록 열정적으로 찬양했던 과학의 시대와 이타심은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비록 그는 공포로 가득 찬 유럽의 혁명시대를 살았지만, 깨달음을 얻은 사회적 질서의 도래를 자신했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선조들, 후손들, 동료들에게 의미를 지니고 태어났다.”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해 산다는 것은 행복과 의무의 공통자원인 자비를 향한 본능의 직접적 요구”라고 주장한다.
과학이 진리의 유일한 기준이라고 믿는 오늘날 과학근본주의자들은 인간의 유전자가 불가피하게 이기적이며, 라이벌에 대항해 무슨 수를 써서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도록 만들어졌다고 주장해왔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들은 모두 ‘나-자신’을 최우선으로 놓도록 프로그램 돼있다. 그러므로 이타주의는 환영에 불과하며 인간성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치인 것이다.
많은 사회생물학자들은 이타심도 실제로는 이기적이라고 주장한다.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전이시키기 위해 전략적으로 이타적이 된다는 것이다. 엄마가 위험에 빠진 자식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즉각적인 행위도 결국은 유전적으로 이기적인 행위이다. 그런 행위의 표면적인 의도는 이타적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혈연을 종속시키기 위한 ‘혈연선택’에서 출발한다. 이타주의는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예외로 자연선택의 실수이다. 인간에게 유용한 생존 메커니즘이었던 것이다. 협동하는 법을 배운 인종들은 자원에 대한 절박한 경쟁에서 유용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윌슨도 “이타주의자는 스스로 그리고 가장 가까운 동족에게 보답을 기대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선한 행위는 종종 완전히 의식적이며 계산적이고, 그의 술책은 사회의 복잡한 승인과 요구에 따라 세밀히 조직된다.” 이렇게 ‘덜 노골적인 이타주의’는 거짓말, 가식, 자기기만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왜냐하면 배우는 자기 행동이 실제라고 믿고 연기할 때 더 설득력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타적인 행위를 하는 사람은 그 당시 자신의 이기심을 줄이고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우선하지만, 내심 상대방도 그와 같은 이타적인 행위를 자신에게 하기를 바란다.
이 연재는 ‘인간은 정말 이기적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하고자 한다.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그 해답을 찾아가는 시도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은 정말 도킨스나 윌슨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기적일 수밖에 없나? 우리 주변의 소방관들은 전혀 모르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불타는 집으로 뛰어든다. 하루 종일 시청에서 쓰레기 수집 일을 하면서 주말에 양로원에 가서 노인들에게 봉사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신문에서 종종 읽는다. 이들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70만 년 전 호모 에렉투스를 시작으로 오늘날 현대인까지 인류사의 중요한 사건을 중심으로 인간의 이기심과 이타심이 이루어낸 위대한 문명을 찾고, 오늘날 우리 삶의 지표를 더듬어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