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 칼럼] 문명창출 원동력, 문자와 도시
[나는 누구인가③]
‘우룩(Uruk)’과 ‘도시인(Homo Civitas)’
문명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인가? 바로 ‘문자’다. 인류가 속한 인종이 다른 인종과 달리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 데는 여러 가지 결정적 계기가 있었다. 70만 년 전 인류는 불을 발견해 다룰 수 있었고, 허리를 펴고 두 발로 걷게 됐다. 이들을 ‘호모 에렉투스’ 즉 ‘직립원인’이라 부른다.
그 후 기원전 1만 년경 중동지방에서 인류는 처음으로 보리와 밀을 재배하는 기술을 터득한다. 사냥·채집경제에서 농경·정착경제로 급변하게 됐다. 인류는 파종하면 싹이 나고 그 열매를 추수하는 자연의 순환을 발견하고 자신의 삶과 연결시킨다. 어떤 학자는 이것을 ‘신석기혁명’이라 불렀다. 인류는 이제 겨울 동안 먹을 것을 찾아 다니지 않고 촌락을 이루기 시작했다. 공동체를 이뤄 살다 보니 자연히 갈등이 일어나고 누군가 대표로 나서 중재 역할을 하게 되었다. 바로 이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기원전 6000년경 촌락들이 등장한다. 촌락들이 성곽을 짓고 공동체를 방어하고 필요한 물품을 다른 촌락과 교역하며 점점 촌락들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이 때 촌락과 촌락의 소통, 한 촌락의 행정을 위해 새로운 소통체계가 등장하는데, 이것이 문자다.
인류는 문자를 통해 촌락을 더 큰 촌락으로, 급기야 도시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 최초로 문명을 시작했지만 다른 문명들도 독립적으로 후대에 등장한다. 기원전 3100년 이집트, 기원전 2500년 인도의 모헨조다로와 하라파, 기원전 1900년 중국 황하 유역, 그리고 기원후 9세기경 아메리카 대륙에서 등장하였다. 왜 이렇게 다른 시기에 문명이 등장했을까? 학자들은 기후변화로 농업이 가능해진 시기가 지역별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우룩(Uruk)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 중 가장 먼저 문자를 기반으로 새로운 공동체, 즉 도시로 발전한 곳이다.에 의하면 우룩은 엔메르카르가 기원전 4500년경 건설했다. 수메르(오늘날 와르카, 이라크) 남쪽 우룩은 셈족어인 히브리어로 에렉으로 음역되며, 아마도 ‘이라크’ 국명의 어원이다. 우룩이란 도시는 인류 최초 영웅서사시 ‘길가메쉬 서사시’의 배경으로 유명하다. 기원전 27세기 우룩 왕인 그는 불멸을 찾아 가는 영웅으로 등장한다.
진흙 계약서에 인장으로 소유 표시
우룩은 문명이란 개념을 처음으로 시도하고 완성한 도시다. 문명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는 문자와 도시다. 이 두 요소가 동시에 존재해야 시너지를 발휘해 문명을 이룰 수 있다. 고고학에서 설정한 우룩 IV지층은 기원전 3300년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문자가 등장한다. 문자는 낙서와는 달리 모양이 그림문자라 해도 그 도시의 경제·행정체계 안에서 통용되어야 한다. 그 안에서 진흙이 아닌 돌로 지은 행정건물, 종교시설인 지구라트가 등장한다. 특히 수많은 원통 인장들이 발견됐다. 우룩인들은 소유를 표시하기 위해 건물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고 진흙으로 만든 계약문서 위에 진흙이 마르기 전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원통인장을 굴려 표시하였다. 원통인장은 개인의 정체성과 명성을 표시하는 도구다. 또한 우룩은 오늘날 뉴욕이나 파리처럼 명성 있는, 모든 사람이 동경하는 도시였고 기원후 300년까지 지속적으로 사람들이 거주했다. 우룩은 1853년 대영박물관의 윌리엄 로푸투스가 발굴하면서 과거의 영광이 복원됐다.
수메르인이 건설한 우룩은 기원전 4100~3000년 사이 융성했다. 우룩은 상업과 행정의 중심이었다. 고고학자들은 우룩을 중심으로 도시와 문자가 등장한 사건을 ‘우룩 현상’이라고 부른다. 우룩 유물들은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발견된다. 심지어 이집트와 터키, 이란과 중앙아시아에서도 발견된다. 문명탄생을 연구하기 위한 고고학적 발굴이 완전하지 않아 우룩 현상에 대한 구체적 정황에 관해서는 아직도 논의 중이다. 문명이 시작된 우룩에선 처음으로 그릇이 대량생산됐다. 테두리가 일정하지 않은 우룩 그릇들이 다수 발견된 것으로 미뤄 전문적 도공들이 삯을 받고 생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테두리가 울퉁불퉁한 그릇’은 북쪽 도시 마리에서도 발견된다. 이 그릇이 인간이 처음으로 대량생산한 제품이다.
우룩은 두 지역으로 구분된다. ‘에안나’과 ‘아누’다. 에안나 지역은 우룩의 여신 이난나를 위한 공간이고 아누 지역은 이난나의 할아버지인 아누 신을 위한 공간이다. 우룩에서 발견된 대리석 여성얼굴 가면을 ‘와르카의 가면’ 혹은 ‘우룩의 여주인’이라 부른다. 아누신은 메소포타미아의 가장 오래된 하늘신이며 신들의 모임을 관장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난나 여신이 최고신으로 등극하자 높은 담을 쌓아 그녀를 위한 특별한 공간을 표시했다. 이난나 여신은 샛별여신이자 전쟁여신이다. 수메르 신화에 의하면 이난나 여신은 아버지 신이자 지혜의 신인 엔키로부터 수메르 문명의 문화적 틀인 ‘메’를 훔쳤다고 한다. ‘메’는 우주 삼라만상의 운행원칙이자 인간사회의 규범, 인간 개개인이 살아있는 동안 해야 될 자신의 운명이다. 신화에서 엔키신이 ‘메’를 에리두라는 도시로 가져갔지만, 이난나 여신은 아버지를 속이고 다시 우룩으로 가져갔다. 이 신화는 우룩이 수메르 문명의 중심임을 시사한다. 에리두는 원시적 삶을, 우룩은 새로운 삶인 ‘도시’문화를 각각 상징한다.
수메르는 우룩 시대를 거쳐 초기 왕조시대로 진입한다. 우룩이 아직 수메르 권력의 중심이었지만 그 영향력은 점차 줄고 있었다. 길가메쉬 왕이 우룩의 성벽을 쌓았다. 라가쉬라는 도시에서는 에안나툼 왕이 등장해 라가쉬 제1왕조를 기원전 2500년경 건립한다. 라가쉬의 왕 루갈-짜게시는 우룩을 흠모한 나머지 우륵을 수도로 정한다. 기원전 2334년 셈족 사람인 사르곤이 아가데라는 곳에서 왕국을 세운 후 우룩으로 들어와 이난나와 아누 신전을 재건하였다.
기원후 3세기 이후 버려진 이 을씨년스러운 우룩이 인류가 역사상 처음으로 ‘도시’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창조적 공간이었다. 우룩에서 인류는 자신의 의견을 말이 아닌 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상징체계를 고안해냈다. 이 상징체계는 나만, 혹은 한 집단 안에서만 소통되는 도구가 아니라 다른 마을과 도시에도 통용됐다. 문자를 사용하는 공동체는 자신들이 약속한 문자라는 상징체계를 지키려는 마음과 의지가 있어야 가능했다. 처음으로 도시에 거주하게 된 ‘호모 시위타스(Homo Civitas)’는 서로를 배려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법’이란 체계도 만든다. 초기의 법은 기원전 2400년경부터 등장한 왕정제도에 의해 취지가 흐려졌지만, 공동의 이익을 위한 시도에서 등장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