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 칼럼] 신은 ‘낯설음’이다

인간에게 신은 어떤 존재인가? 신은 천둥소리와 함께 구름타고 나타나 번개로 죄인을 멸하고 자신을 믿는 신자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존재인가? 만일 인간이 신을 정의하고 이해할 수 있다면, 그 대상은 신이라고 불릴 수가 있는가? 루돌프 오토라는 독일 신학자이자 종교학자는 신을 정의할 단어를 찾지 못하고 대신 신의 속성인 ‘거룩’을 독일어로 ‘다스 간쯔 안데레’Das ganz Andere, 번역하자면 “완전히 다른 존재; 절대 타자(他者)”라고 정의하였다. 신은 내가 생각하는, 내 공동체가 생각하는, 혹은 인간이 생각으로 감히 측정할 없는 존재, 즉 ‘절대타자’라고 정의한다.

이 절대타자에는 다음 세가지 속성이 있다. 첫째는 ‘미스테리움’, 즉 ‘신비’이다. 신비는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신비하다. 셀 수 없는 밤하늘의 별, 지구를 포함한 수 천억개 행성들이 저나마 지니고 있는 중력, 인간이 태어나는 과정, 씨앗을 뿌려 싹이 나는 과정…..우리 주위는 바로 이 신비로 가득 차 있다. 이 신비에 대한 반응을 경외심이라고 한다. 아인쉬타인은 이 경외심을 최선의 능력이라고 말한다. 둘째는 ‘트레멘둠’ 즉 ‘전율’이다. 일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웅장하고 압도적인 것을 만날 때 우리는 전율한다. 최선의 음악, 미술, 문학, 사람, 자연, 수학.. 등을 오감으로 느낄 때 소름이 돋는다. 전율할 수 없는 사람은 거의 죽은 사람이다. 셋째는 ‘파시노숨’ 즉 ‘매력’이다. ‘매력’은 설명할 수 없지만 우리의 목숨까지 요구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만일 나에게 매력이 없다면 상대방이 재미없는 사람으로 여길 것이다.

이 낯섬에 관한 이야기가 그리스도교 복음서에 실려있다. 여기 실의에 찬 두 청년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북서쪽으로 12km정도 떨어진 엠마오로 힘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이들은 3년 전 예루살렘에 나타난 한 청년을 만난 후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걸었다. 이 청년의 이름은 예수였다. 예수는 ‘아낌없이 주는 희생적인 사랑의 실천’이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들고 심지어는 신적으로 만든다고 설교하였다. 예수와의 만남을 이들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족과 친구들을 버리고 예수의 제자로 3년간 따라다니며 가르침을 받았다.

이 청년은 신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드러낸다고 선포하고, 그 이웃은 심지어는 원수까지 포함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에게 예수는 깨달음을 주는 랍비일 뿐만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으로부터 해방시켜 독립을 가져다 줄 정치적인 메시아라고 생각하고 지지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예수가 십자가형이라는 로마형벌의 가장 극악무도한 형태로 죽자, 자신들이 바라던 꿈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힘없이 자신의 고향인 엠마오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성공해서 돌아오기만을 바라는 가족들에게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가슴이 답답했다.

복음서에 의하면 이들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지 사흘 후에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을 때, 한 낯선 자와 동행하게 된다. 이 낯선 자는 수심이 가득한 두 제자에게 말을 건다. 두 제자가 절망에 늪에 빠져 괴로워하고 있는데, 이 낯선 자는 주제넘게 말을 건낸다. “당신이 얼굴빛이 안 좋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들은 처음 보는 사람과 말할 기분이 아니지만 이들이 추종한 예수라는 청년과 그의 십자가 처형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말한다. 이들은 특히 예수가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린 메시아였다고 그 낯선 자에게 말한다.

사실 예수는 그 당시 기성종교인 유대교에서는 이단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의 제자였다는 시인은 그들을 곤경에 빠뜨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두 제자는 이 낯선 자에게 자신들이 속내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 낯선 자는 두 제자의 말을 진심으로 듣고 이들의 슬픔을 공감하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토라(유대인의 경전)의 핵심과 메시아와의 상관관계를 두 제자들에게 설명한다. 그는 토라에 등장하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을 설명하고 메시아는 이 세상에서 반드시 고통을 당할 운명이라고 말한다.

이 낯선 자의 토라해석은 획기적이다. 유대인의 토라에는 메시아가 고통을 당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토라를 이 두 제자의 상황에 맞추어 오늘 여기의 삶이 의미가 있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해석을 시도하였다. 이런 해석을 ‘미드라쉬적 해석’이라 한다. 두 제자는 거리의 철학자같은 이 낯선 자의 해석을 무식의 소치라고 반박할 수 있었으나, 그의 지혜와 그의 해석을 들었을 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 두 제자의 위대한 점은 낯선 자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과는 “다른” 해석과 견해를 받아들여 자신들의 세계관을 바꿀 수 있는 마음을 소요했다는 것이다. 두 제자가 고향 엠마오에 도착했을 때 해는 뉘엇뉘엇 지고 있었다.

두 제자는 정처도 없이 어두운길을 갈 낯선 자에게 말을 건다: “날이 저물었으니, 오늘 밤은 우리 집에 가서 식사도하고 주무시고 내일 가시면 어떨지요?” 그 낯선 자는 자신은 급히 가야만 한다면서 한사코 거절하였지만 그들은 그 자를 만류하여 집으로 데려간다. 이들이 집에 도착하여 정성스럽게 낯선 자를 대접하였더니, 그제 서야 그들의 눈이 열렸다. 바로 이 낯선 자가 예수가 아닌가! 그러나 그 순간에 예수는 그들의 눈에서 사라진다. 이 공상과학과 같은 이야기는 무슨 의미인가? 두 제자는 3년 동안 따라 다녔던 예수를 인식하지 못했다.

자신들이 보려고 하는 메시아의 틀 안에서 그를 보려고만 했다. 그것은 한순간의 깨달음이었다. 낯선 자와 공감하고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호의를 베풀었을 때, 그 낯선 자가 바로 ‘예수’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 앞에서 예수가 사라진 이유는 무엇인가? 만일 사라지지 않았다면, 두 제자는 자신들이 만난 예수만 유일한 메시아라고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서 기자는 예수가 그들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기록함으로 예수는 바로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매일 매일 만나는 ‘낯선 자’라고 증언한다. 우리와 생각이 다른 낯선 자를 회피하거나 차별하고 우리 스스로 변화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신을 만날 수 없다.

우리가 자신의 ‘자아’라는 무식에서 벗어나 ‘무아(無我)’로 신을 대면하기 위해 ‘다름’을 수용하여 우리의 삶을 적극적으로 변화시켜야한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어떤 존재를 우리는 신(神)이라 부른다. 신의 특징은 바로 ‘낯 설음’과 ‘다름’이다.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가 속한 소위 ‘아브라함종교 전통’에서 ‘거룩’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코데쉬’와 아랍어 ‘쿠드쉬’는 모두 “구별; 다름”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제한된 경험으로부터 형성된 파편적이고 편견적인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나 자신과는 완벽하게 다른 존재와의 만남이 종교이다.

우리는 우리와는 다른 이데올로기, 종교, 세계관을 가진 자들로부터 경청하고, 그들을 통해 우리 스스로 개벽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신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그 낯설음과 다름을 수용하고 그 다름을 단순히 참아주는 똘레상스가 아니라, 다름을 소중히 여기고 대접할 때, 신은 우리에게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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