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다 같은 유대인 아니야
화폐인물 논란으로 본 유대민족 갈등
이스라엘 새 지폐에 누가 들어가냐를 놓고 논란이 뜨겁다. 새 지폐 도안은 유대인 시인들로 최종안이 제시됐다. 샤울 체르니코브스키와 나탄 알터만의 초상을 담은 50세켈과 200세켈 도안이 이미 의회에서 승인돼 올해 말부터 발행된다. 나머지 20세켈과 100세켈에는 라헬 블루스타인과 레아 골드버그의 초상이 후보에 올라 있다.
문제는 이 4명이 모두 아쉬케나지 유대인이라는 점이다. 이를 두고 출신이 다른 유대인 집단에서 자신들의 조상이 배제된 데 강한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미즈라히 전통 종교정당인 샤스당의 아리예 데리(Aryeh Deri) 의원은 현재 유통중인 화폐를 포함해 미즈라히 유대인 인물이 한 명도 없음을 지적하면서 의회 승인을 반대하고 나섰다. 논란이 일자 벤자민 네탸나후 총리는 공감한다는 개인적 입장을 밝히면서, 다음에는 세파르디 유대인 랍비 예후다 할레비을 포함시킬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화폐 도안은 최소한 10년 안에는 변경이 없을 예정이어서 ‘립서비스’에 불과하다는 힐난을 받고 있다.
유럽 출신 아쉬케나지가 독점
유대인이라면 같은 인종이라고만 생각했던 사람에겐 이런 논란이 낯설뿐더러 출신이 다른 유대인의 차이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스라엘을 찾는 이들이 놀라는 것 중 하나가 미디어를 통해 보던 유대인과는 다른 모습의 유대인들이다. 보통 유대인 이미지는 검은색 코트와 털모자를 쓰고 귀밑머리를 길게 꼬아 늘어뜨린 초정통파 종교인의 모습 아니면 서구인과 별 차이가 없는 유럽인의 모습이다. 때론 좁은 얼굴과 부리부리한 눈매, 매부리코가 유대인의 전형적인 외모로 대변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모두 유대인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렇다면 ‘유대인(Jews)’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유대인을 강제수용소에 보내고 처참한 학살을 자행했던 나치 독일은 아리아 인종의 혈통적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아리아 인종을 구별하는 신체적 기준, 즉 머리털이나 눈동자 색깔, 코의 높이, 턱의 모양 등의 구별법을 세웠다. 하지만 유대인 분별기준으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이미 유대인은 외모로는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치는 혈연관계에 의거해 조부모가 유대인이면 유대인으로 분류했다.
유전학 연구결과 유전자검사로 유대인임을 증명할 수 있다고 한다. 최근 유방암 발병을 우려해 절제수술을 받은 안젤리나 졸리가 사전검사에서 발견한 BRCA1 유전자 변이가 바로 아쉬케나지 유대인 여성에게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유전자이다.
그러나 유대인의 범주는 좀 더 다양하다. 이스라엘 정부에서 ‘귀환법(the Law of Return)’에 따라 이민을 허용하는 유대인의 기준을 보면 △유대교 율법을 따르는가에 상관없이 혈통적으로 부모가 유대인인 경우 △조상 중 유대인이 있었던 경우 △유대교로 개종하고 율법과 관습을 따르는 경우 등이다. 에티오피아에 살던 유대인(Beta Israel)이나 인도에 뿌리를 내린 코친 유대인(Cochin Jews) 등은 수 천년 전 흩어진 유대인의 후손으로 현지사회에 동화돼 살아왔으나 안식일, 정결율법 등 종교적 생활양식을 지켜 유대임을 인정받은 이른바 ‘잃어버린 지파(Lost Tribes)’다.
직계 후손들도 조상들이 살던 지역에 따라 출신이 구분된다. 크게 아쉬케나지(Ashkenazi)와 세파르디(Shefardi), 그리고 미즈라히(Mizrahi) 유대인으로 나뉜다. 아쉬케나지는 독일을 가리키는 말뜻 대로 독일을 포함한 유럽 전역에 살던 유대인을 말한다. 현재 이스라엘의 유대인 인구 중 약 4백만 명, 전세계 유대인 중 80% 이상을 차지한다. 가장 인구가 많은 만큼 우리가 알고 있는 유대인들도 이들이 많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지그문트 프로이드, 시온주의 주창자 테오도르 헤르즐이 이 범주에 속한다.
세파르디는 스페인이란 어원 대로 이베리아반도 출신 유대인이다. 넓게는 중동 및 북아프리카 지역 출신을 포함하고, 아쉬케나지를 제외한 유대인을 통칭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에 140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를 차지하고 있었던 당시 유대인들은 상업·과학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왕실 천문학자로 천측력을 발명한 아브라함 자쿠토,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 등이 세파르디 유대인에 속한다.
미즈라히는 ‘동방’이라는 뜻으로 중동, 주로 예멘·이라크·시리아·이란 등지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을 말한다. 최근에는 모로코·알제리·수단 등 북아프리카의 마그레비(Maghrebi) 유대인도 미즈라히 유대인의 범주에 둔다. 140만 명 정도가 이스라엘에 살고 있다. 가수이자 ‘아메리칸 아이돌’ 심사위원인 폴라 압둘(Paula Abdul)가 시리아 출신 미즈라히 유대인이다.
피부색 검을수록 차별 심해
유대인이란 하나의 범주에 묶여 있지만 피부색과 언어가 다르고, 출신지별 생활양식, 종교적 성향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한 이들 사이에는 갈등과 차별, 반목이 존재한다. 단순히 문화적 차이 만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수준 차이로 인한 갈등요인이 크다. 아쉬케나지 유대인들은 부유층이 많았고, 건국 초기 국가에서 무상으로 지원한 키부츠나 모샤브 같은 농경지와 여러 혜택들로 인해 넉넉한 부를 축적하고 살고 있다. 하지만 원래 낙후된 생활로부터 도망쳐 온 세파르디나 미즈라히 유대인들은 건너올 때부터 하위계층으로 편입되었고, 대부분 기능공, 상인이어서 초기 농업 위주 정착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이들은 통혼에도 부정적이었다. 1950년대 후반에는 서로 다른 출신 부모로부터 태어난 아이 비율이 14%에 불과했고, 1990년대 후반 들어서도 30%를 넘지 못했다. 이스라엘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아쉬케나지가 미즈라히 유대인에 비해 대학진학률이 두 배 높으며, 수입도 아쉬케나지기 미즈라히 유대인보다 36%나 높았다. 미즈라히 유대인의 실업율은 아쉬케나지 유대인보다 5배나 높은 7.5%로 조사됐다.
백인에 가까운 아쉬케나지 유대인이 상위계층을 차지하고 남부유럽 출신의 세파르디, 중동 출신의 미즈라히, 그리고 인도계와 에티오피아계 유대인으로 갈수록 피부색이 검어지면서 사회계층의 하위를 차지한다. 현재 이스라엘의 최하위 계층으로 꼽히는 집단은 에티오피아로부터 건너온 흑인 유대인이다. 2009년 한 학교에서 입학을 거부당한 사건이 이슈가 됐고, 최근 남부 이스라엘에서 집주인이 이들에게 세주는 것을 거부해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1990년대 말까지 이들이 헌혈한 혈액을 전량 폐기했던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에티오피아 이주 여성들에게 강제로 산아제한 주사제를 투약한 것으로 밝혀져 큰 논란이 벌어졌다.
2013년 미스 이스라엘 월드는 처음으로 에티오피아계인 이티쉬 티티 아이나우(Yityish Titi Aynaw)가 차지했다. 정치적 고려라는 지적이 제기됐지만, 그렇더라도 이스라엘 사회에서 인종의식을 새롭게 하고 갈등을 희석시킬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이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