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칼럼] 장기표 형과의 팔순여행, “민주투사 ‘기표’는 버리고 수행자 ‘우상’으로”
우상(牛?)이란 장기표 형의 법명이다. 형이 수배 중에 부산의 태종사에 잠시 머물러 있을 때, 그 절의 주지로 계시던 도성(道性)스님에 의해 삭발, 출가하게 되면서 스님으로부터 수계 때 받은 이름인데, ‘밭을 가는 소’처럼 수행 정진하라는 의미를 담은 법명이다.
형의 머리를 깎기고 계를 주신 은사 도성스님은 오랫동안 성철스님을 가깝게 보필하며 해인사 주지를 지내시기도 하셨는데, 간화선 수행의 한계를 절감하고 70년 초에 다시 태국 승단에서 정식 계를 받고 남방불교 전통의 수행법인 위파사나 수행을 정진해 오면서 한국테라와다(상좌부)불교를 이끌어오신 분이기도 하다.
장기표 형의 출가 기간이 비록 1년 남짓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출가수행 기간에 보여준 그의 수행담은 당시의 신도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길 정도로 한 올 흐트러짐 없이 치열하고 철저했다고 한다.
내가 이 이야기를 앞서 하는 것은 우상 형은 영원한(?) 수행자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형을 이 시대의 사드비프라(Sadvipra), ‘영성적 정치지도자’라는 단어와 함께 떠올리곤 한다. 그런 점에서 형이 스스로를 영원한 정치운동가라고 자처하는 것에는 공감하기도 하지만, 그의 정치는 여태까지 줄곧 실패의 길만을 걸어왔다.
한마디로 형은 실패한 정치인이다.
그러나 그것을 정치운동이라고 보면 달리 해석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내가 정치를 하는 자들과는 인연을 끊고 지내오면서도 유일하게 형과의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나는 정치하는 자들, 특히 지금 이 나라에서 정치인이라고 나대는 자들에게서 보여지는 탐욕과 무지와 허위의식, 특히 부끄러움조차 잃어버린 양아치들보다 못한 그 뻔뻔한 작태들을 더 이상 바라볼 수 있는 내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어 요즘에는 아예 인터넷으로도 정치에 대한 이야기는 접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런 무리들 속에서 형이 함께 휩쓸리는 것이 더욱 안타깝기도, 안쓰럽기도 하다. 더구나 그런 자들과 그런 자들을 추종하는 무리에 의해 형이 받는 수모를 볼 때면 아직도 그 판에서 자신의 역할을 고집하는 기표 형이 미련하고, 우둔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우상 형이 올해, 우리 나이로 팔순이 되었다. 한평생을 이른바 운동판과 정치판에 몸 바쳐온 것이다. 20대 때, 전태일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던 첫 대학생 친구에서부터 지금 팔순의 실패(?)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뜨겁고도 지난한 한생이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으리라 싶다. 우리 운동판에서 가장 오랜 수배와 가장 잦은 옥고를 치른 사람, 그러면서도 자신의 원칙과 신념에 투철했고 자신에게 더욱 엄격하고 철저했던 한 사람, 어쩌면 우리 시대의 마지막 지사라고 할 수 있는 이의 팔순인 것이다.
그 의미가 나에게도 남다르게 다가왔다. 그래서 형과 형수에게 한번 내려오시라고 했다. 초여름의 남녘바다를 함께 보며 팔순을 축하드리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그렇게 어제와 그제, 형님 내외와 남녘 바닷길을 함께 걸었다. 내가 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는 그 길을 함께 걸으며 고맙고 행복했다.
해안 벼랑 곁의 동백나무 진초록 잎새가 반짝거리는 울창한 숲길을 함께 걷기가 형님의 팔순을 기념하는 우리 내외가 마련한 작은 여행선물인 셈이었다. 우상 형과 형수도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형님은 이 땅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다는 것을 여태 알지 못했다며 가는 곳마다 감사하고 감탄했다. 두 분의 좋아하시는 모습에 우리 내외도 고맙고 기뻤다.
문득 오래전에 형과 함께했던 여행들이 떠올랐다. 형이 민민(민주, 민중)운동의 실무를 총괄하고 있을 때, 자신은 설악산을 좋아하고 간절히 가고 싶기도 하지만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고 바빠서 한 번도 가지 못한다고 쓴 글을 읽고는 형을 억지로 끌어(?)내어 설악산에 함께 갔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또다시 수감되어 있을 때, 형에게 편지를 썼다.
내 형편이 형에게 영치금을 보낼 수 없는지라, 출소하면 형을 모시고 지리산을 안내하겠다고. 그렇게 해서 내가 형님 내외를 모시고 지리산 천왕봉에 올랐다가 칠선 계곡을 온종일 내려와서 벽송사에서 묵었던 때가 있었다. 벌써 30년도 더 지난 옛 기억들이다. 그리고 이번에 형의 팔순을 위한 짧은 여정을 마련한 것이다.
어제 아침에 식사와 차를 나누면서 내가 형에게 정식으로 말씀을 드렸다. 이제는 정치판을 정리하고 생의 마지막 일을 마무리하시라고. 여태껏 형이 정치판에 몸담아 오면서 썩은 정치판을 바꾸고 함께 사는 건강한 세상을 위한 바른 정치의 실현에 헌신해왔지만 어느 것 하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비록 형의 뜻이 크고 올바르다고 하더라도 시대의 기운이 호응하지 않은 것이니, 그것은 형을 위한 하늘의 뜻이 다른 데에 있다는 것이다. 가령 지난번 ‘특권폐지국민운동’이 그 타당성과 필요성에도 불길처럼 타오르지 못하고 사그러든 것도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즉 이제는 길을 달리해야할 때가 되었다. 그건 좁은 정치판을 떠나 인류와 세상 전체를 아우르는 길을 찾고 제시하는 새로운 수행자의 삶을 사시는 것이라고 그렇게 말씀드렸다.
내 말의 뜻은 정치판, 운동판을 새로운 관점에서 정리하고 그 이후에 나가야 할 방향, 그 길을 새롭게 제시하는 일을 형의 마지막 과제로 삼으면 좋겠다는 의미였다. 그 과제를 감당하고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내가 알기에는 형님 말고는 달리 보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다른 모든 것을 놓고 생의 마지막 과제로 그것에 전력하는 것이 형이 새로운 출가자로, 수행자로 다시 사는 길이라 싶기 때문이다.
형은 오래전부터 문명전환을 위한 신문명연구소를 운영해왔고, ‘사랑과 자아실현의 정치’라는 새로운 정치담론을 이미 제시한 바도 있으므로 이를 추슬러 새로운 시대의 담론으로 정리하는 역할과 작업이 형에게 가장 적절하고 필요한 과제라 싶은 것이다. 그 일을 마치 소가 밭을 갈듯이 우직하게 남은 생의 힘과 열정을 여기에 쏟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형수님도 형이 출가수행자의 삶으로 돌아가는 데 찬성이다. 기꺼이 그런 삶을 뒷바라지 하겠다고 하신다.
내가 이번 여행을 계기로 형을 영원한 민주투사 기표 형에서 수행자 우상 형이라고 부르기로 한 것은 이런 까닭이다. 우상 형의 팔순 기념여행을 함께 하면서 나 자신도 새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어 더욱 고맙고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남녘 바닷길에는 쪽빛 바다 곁으로 수국이 이제 막 피기 시작했고, 가는 곳마다 금계화 노란 황금빛 물결이 마치 우리를 영접하듯이 반겨주었다. 초여름, 남녘바다의 눈부신 여정이었다.
영원한 수행자 우상형의 팔순을 다시 축하드리며 이제 남은 길에서 더 깊은 평화와 기쁨이 언제나 함께 하시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