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원의 시선] ‘만성두통’ 몰고 오는 ‘만성 충족’

부산 영도항에 정박한 배들 <사진 윤일원>


억센 배가 순한 양이 되듯

부처님이 사라쌍수에서 열반에 드셨다. 자신의 전법을 전해준 가섭존자가 먼 길을 떠나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드디어 가섭존자가 7일 만에 나타나 관을 세 바퀴 도니 세존께서 곽에서 두 발을 꺼내어 보여주었다. ‘곽시쌍부(槨示雙趺)’라는 화두다. 왜, 부처님은 마지막 가르침으로 두 발을 보여주었을까?

미당 서정주의 ‘신발’이라는 시의 내용이다. 아버지가 명절날 신발을 사 주었는데 그만 놀다가 바다로 흘려보내고 나니 아버지께서 또 새 신발을 사다 주었다. 그러나 시인에게는 온 바다를 굽이치면 놀고 있는 신발이 진짜 신발이고, 아버지가 사다 준 새 신발은 예순이 다 된 지금까지도 신고 있지만 여전히 자기 것이 아니라고 능청을 떤다.

우리는 무언가 새로운 갈망이 필요할 때 원하는 것을 즉시 얻는다. 이제는 나가지도 않고 늦은 시간 컴퓨터 앞에 앉아 클릭 한 방이면 다음 날 새벽에 물품이 도착한다. 풍요의 천국 시대에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나날이 새로 입혀져 덧대어지는 정체성, 신발이 맨발이 되도록 돌아다녀 겨우 얻었던 진귀한 재화가 클릭 한 방으로 얻어지자, 만성 충족이 만성두통을 몰고 왔다.

현대인의 만성 충족, 만성은 심성을 무뎌지게 하고, 심성이 무뎌지면 싫증에 빠지고, 싫증에 빠지면 몹쓸 병이 돌게 된다. 내 삶의 이력이 두 발이 전부였던 시대에서 두 손이 전부인 시대로 바뀌자, 우리의 마음도 공허로 바뀌어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은 갈증 상태에 이른다.

노자의 일침이다.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知足不辱), 그쳐야 할 곳에 그칠 줄 알면 위태로움에 빠지지 않는다(知止不殆).” 궁핍이 심하여 견디기 어려웠던 시절, 희귀한 재화는 무엇이고, 이루기 힘든 명예는 또 무엇이며, 이득과 손실의 병은 또 어떤 것인가?

자, 맑은 물 한 동이를 얻기 위해 두어 시간 맨발로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아프리카의 아이들이다. 그들이 간절히 원하는 얻기 어려운 재화는 맑은 ‘물’이며, 물이 충족되면 ‘신발’이 되고, 신발이 충족되면, 자기의 ‘정체성’을 완성시켜 줄 그 무엇을 향하여 끊임없는 행보를 할 것이다. 과거 우리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또 그렇게 그 길을 따라 걸어 올 것이다.

우리가 걸어 온 길 중 어디에서 족함을 알고 어느 지점에서 멈춤을 시작해야 할까? 아직 족함과 멈춤에 도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 지점을 안다면 좀 덜 위태롭지 않을까?

어떤 이는 “야, 몸이 전부이니 몸이 성성하고 건강할 때 멈추어야제”라 하고, 또 어떤 이는 “서울에서 30평쯤 아파트는 있어야제, 글고 자식 혼사는 다 마쳐야지” 한다.

그 기준은 단 하나, 상대 세계에서 절대 세계로 넘어오는 시점이다. 온갖 것의 비교치와 시비가 사라진 절대 세계로의 여행에는 매우 깊은 똥통이 도사리고 있는데 이를 건너는 무기가 바로 가슴에 대못을 박아 세간의 눈총을 막은 후 쪽팔림의 사다리를 만드는 일이다. 그러면 당장 인위로 만든 명예와 지위는 물론 자기의 능력으로 채웠다고 자부하는 돈으로 이룬 온갖 것이 하찮게 보인다.

욕심이 사라지자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인간으로 돌변하여 돈이 있어도 할 수 없는 일에 주목하고, 돈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에 빠지고, 마지막으로 돈이 없어도 할 수 없는 일이 화두가 되어 말하는 문법이 달라진다.

부처님이 가섭존자에게 전한 마지막 가르침, “내 두 발을 보라.” 꾸덕살이 잔뜩 배겨 더러워진 발바닥, 말의 경전이 아니라 발의 경전, 이것이 그의 정체성이었다면, 노자는 두 발을 보고 족(足)함을 깨달아 그치기를 원했다.

부산 영도항에 정박중인 이 배는 헌 타이어와 쇠사슬로 보호받고 있는 걸까? <사진 윤일원>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