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원 칼럼] ‘강한 반동’은 내 삶의 의지
세밑 맹한(猛寒)이 몰아치니 한겨울이 성성하게 살아있음을 실감하고 이럴 때 따뜻한 온돌방이 그립다. 온돌방은 매끈매끈한 돌을 찾아 구들을 만들지만, 구들이 정사각형이 아니라 타원형이다. 때론 울퉁불퉁한 구들로 만들어, 군불 땐 그을음이 구들 밑에 들러붙어 불길을 가로막아 윗목은 차가워 얼음이 되고, 아랫목은 절절 끓어 궁둥이를 이리저리 굴러야 잘 수 있다.
정조 시대 이덕무(李德懋)는 가난하기 이를 데 없어 한겨울에도 장작을 살 돈이 없는지라 차가운 구들방에 덜덜 떨면서 잠을 청하지만, 잠이 올 리 만무했다. 하여 한서(漢書, 한나라 역사서)를 꺼내 이불로 삼고, 논어로 병풍을 쳐 위풍을 막아 보지만, 어찌 덜덜 떠는 맹한(猛寒)의 추위를 이길 수 있으리오?
우리말에 ‘반하다’는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하나는 순수 우리말로 ‘무엇에 홀딱 빠져 정신을 못 차리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한자어로 ‘앞 문장을 부정’하는 말이다.
“그는 한라산의 설경에 반했다”고 하면, 한라산 설경에 푹 빠져 정신이 해롱해롱한 것을 말하고, “그는 성격은 참 좋은데 반(反)하여”라고 쓰면, 성격만 좋다는 뜻으로 뒤이어 나쁜 말이 이어짐을 예고한다.
<노자>에 ‘反者道之動’이요 ‘弱者道之用’이라는 말이 있다. “반자는 도의 동인이요, 약자는 도의 쓰임이다”라 정도의 해석이 무난하다. 문제는 한자 반(反)의 해석이다. 반의 뜻으로 ‘회귀’, ‘반복’, ‘상반’, ‘반골, ’반대’의 문자적 해석이 있다. 문제는 뒤 문장 약(弱)과 대구를 이루려면 ‘모나고’, ‘삐뚤고’, ‘반골’, ‘반동’ 등 울퉁불퉁한 부정적 의미로 해석함이 더 좋을 듯하다.
그래야, “우리 삶의 의지, 되튕겨 나오는 강한 반동(反動, 反者道之動)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질문이 성립된다. 아무리 양보해도, “내 맘속에 한 움큼 들어 있는 강한 반동 기질인 울퉁불퉁한 돌덩이가” 맞는 것 같다. 이것이 생의 강한 의지로 변할 때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간다.
그러니 자식놈이 울퉁불퉁하여도 그것이 그놈 생의 의지라 여겨야지, 이를 말살하려고 덤볐다가는 그의 생의 의지마저 소멸시켜 되튕겨 나올 힘을 잃게 만든다. 그렇지 않은가? 이미 닳고 닳아 반들반들한 형질로 변했다면 현실에 안주하려 타협할 의지밖에 없다고 할 것이다.
또한 “강한 반동 같은 기질이 어떻게 쓰여야 삶에 스며드냐에는 약용(弱用, 弱者道之用)”이 맞다. 세상을 다 품을 듯한 천하의 거목도 작고 여린 새싹에서 시작하였고, 장강의 만리 물길도 한 방울 물로 시작됨을 안다. 그러니 작고 약하고 힘없음으로 강한 반동을 갈무리한다면 도(道)의 실체에 어느 정도 다다랐다고 나는 분연히 말하리라.
<노자>는 천하 만물이 있음(有)에서 나와 없으므(無)로 되돌아간다고 하였지만, 내가 보기에는 어림도 없는 메타포다. 나는 “천하 만물은 가마솥 밑에 붙은 숯검정 같다”고 하겠다. 우리가 군불을 땔 때 장작이 불에 타 실체는 사라지고 그을음 몇 개가 겨우 가마솥 밑에 달라붙어 숯검댕이로 변한다.
그러던 어느 날 큰불로 장작을 지피거나 홀연히 강풍이 불 때, 숯검댕이는 방구들을 따라 연기와 함께 굴뚝으로 사라진다. 여기에서 생성과 소멸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있는 듯하다가 없고, 없는 듯하다가 있는 것,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것이 태초의 생성 원리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