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고향 앞으로···”반쯤 비운 술잔에 보름달 가득”

필자의 예천 고향 마을. 그곳에 남아있는 우정과 우애를 퍼담아 오련다. <사진 윤일원>

내일이면 추석이다. 나는 언제나처럼 고향으로 간다. 산천은 의구한지? 친구는 변함 없는지? 부모님 계신 곳은 편안한지? 내 가서 살펴보리라. 남들은 추석을 고향이라는 향수보다는 가족의 만남이라 여겨, 이리저리 긴 연휴에 여행도 가고 해외도 가지만, 난 그냥 내 고향으로 간다. 거기도 다른 어느 곳보다 아름답고 짙은 향내가 배어난다.

언제나처럼 새벽 4시에 일어나 나만의 성스러운 리츄얼을 준비하고 시행한다. 글이다. 그 글을 읽으면 뇌가 마법처럼 나를 특별한 영역에 접근케 하여 나를 더욱 특별한 존재로 만들고, 그 특별한 존재에서 나오는 아우라가 나를 감싸 나를 방어해 준다.

맨 처음 드는 마법의 주문은 크리스텐슨 교수의 <당신의 인생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나오는 ‘하버드 동창생 30년사’ 대목이다. 모두 세계 최고 대학이라 일컫는 하버드대학교, 그것도 MBA 동창생들의 30년 역사다.

졸업 첫 5년 만의 만남은 화려함의 극치다. 참석인원도 어마어마하지만 모두 좋은 직장에다 자신보다 뛰어난 미모의 배우자를 동반하고 왔다. “나 이렇게 잘 나가고 있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신라시대에 세운 충주 중앙탑 <사진 윤일원>

그로부터 5년 후, 10년째 만남은 여전히 화려함 속에서 약간의 삐걱거림이 보인다. 그렇지만, 여전히 많은 동창생이 매켄지와 골드만 삭스, <포천>지 500대 기업 CEO를 향하여 과감한 도전장을 내밀면서 사회생활을 한다. 그 사이 간간이 이혼 소식도 들리고, 불행한 결혼 이야기도 들리고, 삶에 즐거움도 찾지 못하고, 입 밖에 꺼낼 수 없는 자식 이야기 등으로 수군거린다.

하회 부용대에 우뚝 선 청년. 그의 먼 꿈이 구체화되길 함께 빌어본다. <사진 윤일원>

그로부터 졸업 후 30년 만에 만나는 동창생들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몇몇은 최고의 명예와 최고의 대우로, 몇몇은 행방불명, 몇몇은 사기죄로 구속, 몇몇은 가족이 해체되어 힘들어했다. 그토록 아우라 넘치던 젊은 시절의 화려함은 사라지고 , 오히려 평범한 사람보다 더 비참한 생활을 하는 이도 더러 있었다.

두 번째 드는 마법의 주문은 실학자 이덕무의 <적언찬>(適言讚)이다. 이름은 현부(玄夫)요, 자(字)는 조화옹(造化翁)이라 불리는 분이 양조장(釀造場)을 짓고 운명의 술을 빚고 있다. 그가 빚는 항아리는 하늘의 기운이요, 그가 빚는 체는 땅의 기운이라… 이렇게 빚은 술로 사람이 태어날 때 마시게 한다.

고구마 캐는 필자의 모친 등 가족들. 이들이 캐 올린 것은 사랑이고, 함께 만들어온 미구에 이뤄질 꿈이다. <사진 윤일원>

조화옹이 만든 규칙에는 술맛을 보기 위해 몰래 단지를 자주 들춰보면 운명이 조급해지도록 하였으며, 술이 무르익었는데도 마시지 않으면 운명이 시어지도록 하였으며, 술을 마시지 않으려고 교묘하게 이리저리 피하면 흉사(凶事)를 만나도록 하였다.

술은 적당히 익을 때 맛과 향이 뛰어나듯이, 운명도 적당히 무르익을 때 맛과 향이 가장 뛰어남을 알고, 조급히 화를 내거나 빈둥거려서는 안 된다. 조화옹은 각각의 사람에 대해 어떤 사람에게는 진한 술을, 또 어떤 사람에게는 묽은 술을 주었으니 이것은 은혜도 아니요, 곤궁도 아니니 그리 알고 군소리 없이 마시는 것이 더 좋다고 한다.

이제 나의 성스러운 마지막 주문을 읽을 즈음 인왕산 위로 붉게 여명이 비춘다. 그 무렵 <장자>의 『서무귀』 편을 꺼내 읽는다.

춘추전국시대에 여상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는 뛰어난 재주로 위나라 무후를 모시고 시서예약과 금판육도를 가르치면서 나라가 부국강병 하기를 밤낮으로 임금 곁에서 시책을 만들어 바쳤다. 하지만, 임금은 한번도 웃지 않았다. 여상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서무귀(徐无鬼)라는 사람이 임금을 뵙고 나오자 임금은 종일 어금니를 보이면서 웃었다. 여상은 서무귀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도대체 무슨 말씀을 임금에게 드렸기에 임금께서 종일 웃고 계십니까? 하니 “나는 다만 개나 말을 감정하는 이야기를 했을 뿐이오” 한다. 여상이 따지듯이 “그것뿐입니까?” 하니 “그것뿐입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면서 서무귀는 “혹 월나라에 도형수 이야기를 듣지 못했소?” 한다. 그는 사람이 그리웠다. “하루 동안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저 멀리 사람 소리만 들어도 기쁘고, 열흘 동안 사람을 만나지 못한 먼발치에서 사람 모습만 봐도 기쁘고, 몇 년 동안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인적이 드물어 사람이 다니는 길이 족제비가 다니는 길로 변해 길을 찾으려고 이리저리 헤맬 때 먼발치에서 사람의 발소리만 들어도 기뻐하듯, 하물며 형제 소리가 바로 가까이에서 들린다면 얼마나 기뻐하겠소.” 한다.

그렇다. 사는 게 뭐 별거인가? 하버드 MBA 출신도 머리 수준에 따라 행복이 따라오지 않고, 조화옹이 빚어준 술도 사람마다 제각각 다르다.

그럴진대 남들 시샘 말고, 오랜만에 부모님 뵙고 친구 만나 정다운 사투리에 옛 음식을 앞에 두고 웃고 떠들면서 어금니 보이도록 활짝 웃는 일, 그런 추석 맞으면 최고 아닐까?

구절초

*사진은 작년 고향 가는 길(2022년 9월 20일)에서 찍은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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